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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집]은행동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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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사동(大寺洞) 한적골의 거리제

    (1) 조사지 개관

    대사동은 보문산 앞자락에 위치하여 북쪽으로 대흥동, 동쪽에는 부사동, 서쪽에는 문화동, 남쪽으로 보문산을 경계로 문화동과 호동 사이에 위치해 있다. 옛날 이 곳에 큰절이 있었기 때문에 한절골로 불리었는데, 음이 변하여 ‘한적골, 한잣골’이라 하였다. 지금도 보문산 주변에는 많은 절터와 절들이 들어서 있다.

    백제 때는 우술군(右述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비풍군(比豊郡)에 속한 지역이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공주목에 속하였다. 고종 32년(1895)에 회덕군 산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대산리(垈山理)와 목척리 일부를 병합하여 대전군 외남면 대사리에 속하였다. 1932년 대전읍의 신설로 대사리의 일부가 대전읍에 편입되었다. 1935년 대전부의 설치로 대전부 대사정으로 편입되었다. 1949년 지방자치제 실시로 대전부가 대전시로 개칭되면서 대전시 대사동이 되었다. 그 뒤 1977년 구제 실시로 중구 대사동이 되었고, 1989년 1월 1일 대전이 직할시로 승격됨에 따라 대전직할시 중구 대사동에 편입되었다.

    구전에 따르면 신석기시대 이전부터 인류가 정착한 곳이라고 하나 근거는 희박하다. 대사동은 1993년 12월 현재 면적은 1.99㎢이며, 3,369세대(인구 11,564명)가 거주하고 있으며, 행정관할구역은 21통 111반이다. 주요기관으로는 대신초등학교와 파출소 등이 있으며, 행정관할구역은 21통 111반이다. 주요기관으로는 대신초등학교와 파출소 등이 있으며, 법정동이자 행정동이므로 동사무소가 소재하고 있다.

    옛 한적골은 현재 대전공설운동장, 대흥동 현대아파트, 보문산공원, 테미공원 밑으로 매우 넓은 지역이었다. 당시에는 약 250여 호가 거주하였으며, 각성 받이 이다. 이 지역의 자연마을은 한절골, 조탑, 고개너머, 서낭댕이 등이 있었다. 한절골은 한적골이라고도 불린다. 백제 이전부터 마을이 이미 형성되어 있었으며, 큰절이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한절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일제 초반까지만 해도 중구에서 가장 큰 마을이라고 하여 한절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일제 초반까지만 해도 중구에서 가장 큰 마을에 속했으며, 큰절이 있어 그 주위로 암자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꽃이 많이 피는 계곡이라 하여 파곡(波谷)이라고 부르고, 겨울에는 계곡이 운치가 있다고 하여 한계(寒溪)라고도 부른다. 조탑은 둥구나무가 있던 마을이다. 고개너머는 현재의 충무체육관 자리에 있던 마을이며, 서낭댕이는 보문산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고개너머는 현재의 충무체육관 자리에 있던 마을이며, 서낭댕이는 보문산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이들 마을에서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특별한 농작물 없이 벼농사에 주력하였다. 장은 인동장으로 다녔다.

    (2) 제의 실태

    ① 한적골의 거리제

    이 마을에서는 마을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해마다 거리제를 지내고 있다. 이 제의를 언제부터 지내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상 대대로 이어온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오래되었다고 하겠다. 그 후 6. 25이후 2~3년 정도 중단되었는데, 노인분들이 전쟁 중에 돌아가셔서 제를 지낼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후로는 지금껏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으며, 마을 어른들이 주관하다가 최근에 노인회에 일임하였다.

    제는 음력 정월 열나흔날 낮에 지냈으나 최근에 오후 4~5시경으로 바꾸었다. 이처럼 이른 시간에 제를 지내고 있는 것은 이 마을만의 특징으로 지적된다.

    제는 마을 입구의 느티나무에서 지내는데, 이 나무는 1982년에 시보호수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고유번호는 6-1(대사동 104-8번지), 수령(樹齡)은 500여 년이며, 수고(樹高)는 15m이고, 둘레는 5.1m이다. 이 나무에 대한 주민들의 관심이 남다른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마을에 초상이 나서 출상할 때는 이 둥구나무를 한바퀴 돌고 나간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동네에 화가 일어난다고 하여 반드시 지킨다. 실제 출상을 하는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등구나무를 안돌고 나갔더니, 그 이후에 계속해서 줄초상이 났다고 한다. 이는 마을의 어른인 둥구나무에 인사를 해야 한다는 관념의 소산인 듯하다.

    제를 지내려면 사흘 전부터 주민들은 제의 준비에 바빠진다. 우선 둥구나무와 유사집에 금줄을 치는데, 금줄은 왼새끼로 꼬아 그 사이에 흰종이를 드문드문 끼워서 두른다. 그런 후 보문산에 가서 깨끗한 황토를 퍼다가 유사집과 둥구나무 앞에 양쪽으로 세 무더기씩 모두 여섯 무더기를 뿌린다. 그러나 현재는 둥구나무에만 금줄과 황토를 할 뿐 유사 집에는 하지 않는다. 제를 지내고 닷새 후에 금줄을 거두어 손 없는 방위에서 태우고 황토는 흩뜨린다.

    예전에는 마을에서 이장과 노인들이 모여 음력 12월 그믐 경에 제를 주관할 유사를 결정하였으나 현재는 노인회에서 음력 정월 10~11일에 적당한 사람으로 정한다. 일단 유사로 선정되면 그 사람은 제비 추렴부터 제의 주관까지 제반 사항을 관장해야 한다. 특히 제 일주일 전부터 목욕재계를 하고 집안에서 근신하는데, 예전에는 보문산의 샘에 나가 찬물로 목욕하였으나 현재는 집에서 알아서 한다.

    또한 제를 앞두고는 유사를 비롯하여 주민들도 비린 음식을 먹지 않고 살생을 금하는 등의 금기를 지킨다. 만약 유사가 부정이 탔다면 다른 사람으로 바꾸고, 마을에서 초상이 났다면 날을 미루어 다시 좋은 날을 받는다. 마을 사람들 중 사람이 죽은 것이나 아이를 낳은 것을 본 사람은 스스로 알아서 제에 참석하지 않는다.

    제비는 노인분들이 주동이 되어 음력 정월 초하룻날부터 풍장을 치며 걸립을 하여 마련한다. 예나 지금이나 기독교인들은 제비 추렴을 하지 않으며, 그들은 제의에도 참석하지 않는다. 현재는 노인회 기금과 작년 제의 때 들어온 기부금으로 제를 치르고 있는데, 한 해에 약 70~80만원이 소요된다. 제물은 유사가 인동장에 가서 구입해온다. 장을 오갈 때 특별히 지켜야 하는 금기사항은 없으나 제물 구입시 값을 깎지 않고, 물건도 첫눈에 들어온 것을 사도록 한다. 근래에 들어 인동장이 활성화되지 않아 대전역전시장을 이용하고 있다. 제물은 유사부인이 마련을 하는데, 삼색실과, 팥시루떡, 돼지머리, 명태 두 마리, 불밝이쌀 등을 쓴다. 술은 예전에 막걸리를 썼으나 지금은 정종을 사용한다.

    옅나흗날 제의 시간에 임박하면 주민들이 알아서 제장으로 나온다. 과거에는 마을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 치른 제의였으나 현재는 시장, 구청장, 동장 등의 기관장들까지 참여하는 지역제의로 확대되었다. 그래서 제를 지내기 전에 미리 노인회에서는 주민들과 인근 관공서에 제의 거행을 알리는 안내 글을 보낸다. 그 원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근계시하 신춘지절에 존체금안 하심과 고당의 만복을 앙축하나이다.

    아래을 말씀은 대사동 전래의 행사인 120만 대전시민의 안녕과 태성성세를 기원하는 당산제를 다음과 같이 올리 고저 하오니 부디 오셔서 자리를 빛내주시기 바랍니다. 을해년을 맞이하여 뜻하신 일들이 성취되시고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래

    - 대전광역시 중구 대사동 104-8번지

    시보호수 번호 6-1

    시 보호수 지정일자 : 1982. 11. 1

    - 행사일시 : (음 1월 14일) 오후 4시

    - 행사장소 : 보호수 제단

    중구 대사 노인회장 올림

    거리제는 유교식으로 거행되는데, 유사가 잔을 올리고 마을에서 제일 나이 많은 사람이 절을 한다. 이어 다시 잔을 올리면, 마을 사람들이 일렬로 서서 한꺼번에 절을 하고, 축을 읽는다. 축문은 노인회관에 1988년 1993년, 1997년의 것이 보관되어 있는데, 매년 동일한 문구로 쓰는 것이 아니라 제를 주관하는 사람이 해마다 알아서 마련하므로 그 내용이 다소 상이하다. 그중 1997년에 사용한 축문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祝文

    歲次干支正月干支朔 十四日 干支

    幼學 朴勝德

    敢昭告于

    槐木之神 維比孟春 善時報事

    大寺洞 官民一同 安過泰平

    五穀?登 營業旺盛 萬事亨通

    實賴神休 輩禮將盛 惟

    神靈願飮 永尊數居

    尙饗

    축을 읽은 후에는 소지를 올리는데, 먼저 마을소지를 올리고, 이어 걸립한 집의 대주 소지를 올린다. 근래에는 간소하게 마을 소지만을 올리며, 참석한 사람들이 각자의 소원을 담아 치성을 드리고 음복을 하며 하루를 보낸다.

    <대전직할시사편찬위원회, 1994. pp,415~424./대전문화원, 1988. pp.82~83./원영희(남, 73세, T.226-9252, 유사경험이 있음, 현재 노인회 부회장)/한재윤(남, 66세, T.252-0702, 현재 노인회 총무이며 축문을 가지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