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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집]은행동이야기
  • 안영동(安榮洞) 새뜸 거리제, 창명 거리제
  • 안영동(安榮洞) 새뜸 거리제, 창명 거리제

    (1) 조사지 개관

    안영동은 금산군과 시계를 이루는 새고개 남쪽으로 위치하고, 동쪽으로는 침산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사정동과 접하였으며, 서쪽으로는 서구 복수동, 괴곡동과 접한다. 유등천이 안영동을 흘러 서구와 구계를 이루기도 한다.

    백제 때는 우술군(雨述郡)에 속한 지역이었으며, 신라 때는 비풍군(比豊郡)에 속했으며, 조선시대에는 공주목 산내면에 속했었다. 고종 32년(1895)에는 회덕군 유등천면 안영리, 창명리, 구암리, 윤동리, 신봉리 등의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전군 유천면 안영리로 통합 편입되었다. 1935년 대전부의 설치로 대덕군 유천면 안영리로 되었다가 1963년 대전시 안영동으로 산성동에 편입되었다. 198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산성동에서 복수동으로 분리되었다가 1988년 서구청 서구 안영동으로 편입되었는데,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 승격과 함께 중구 안영동이 되었다. 현재 행정동은 산성동이다.

    안영동의 자연마을은 새뜸(新垈), 검은바우, 도장골(도장굴, 도정골), 부엉동, 새터, 신봉(新峯里), 안영(安永, 元安永), 창명(昌明) 등이 있다. 이 중 도장골, 새터, 신봉 등의 자연마을은 남부순환도로 건설공사로 인하여 없어지고 주민들 일부가 새뜸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다. 새뜸은 도장골 동쪽의 안영교가 생긴 이후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약 14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검은 바위는 안영동 28통의 마을로, 바위의 명칭이 마을이름이 되었다. 마을 뒷산에 검은 바위와 거북바위가 함께 있으므로, 검은 바위 혹은 거북 바우, 구암(龜岩)이라고도 불린다. 도장골은 창명 남서쪽, 안녕교 건너 우측에 있는 마을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비옥한 땅에서 태평을 누리는 농부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 하여 도장골, 도장굴이라고 부른다. 부엉동은 창명 마을회관 위에 위치해 있다. 새터는 산기슭에 있는 성복고등학교 동쪽 아래 안영동 30통 마을이다. 신봉은 창명 남쪽 산 밑에 있는 안영동 29통 마을이다. 산밑에 새로 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안영은 지금의 안영동 북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안영동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라 하여 원(元)자를 붙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세조 때의 충신 박심문(朴審問)의 후예들이 살던 마을이다. 이곳에는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과 청재(淸齋) 박심문(朴審問)을 모신 사당 창계숭절사(?溪崇節祠)가 있다. 창명은 안영교 동쪽 성재 아래에 위치한 안영동 31통 마을이다. 옛날부터 청백한 선비가 살며 민중들의 마음이 대쪽 같고 들판도 윤기가 가득찬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창명은 칭밍정이, 청명이라고도 불린다. 창명에는 약 120여 세대가 거주하고 있으며, 각성받이 이다. 이들 마을에서는 대사동 테미고개를 넘어 인동장을 이용하였다.

    (2) 제의 실태

    ① 새뜸 거리제

    마을을 가로질러 신작로가 생기면서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는 일이 많아졌다. 이에 아주머니들이 주축이 되어 1995년부터 신작로에서 거리제를 지내기 시작하였다. 제를 지내고 나서부터는 사고가 없었다고 한다.

    음력 정월 보름 안으로 좋은 날을 잡아 제를 올리는데, 제일은 유등천변에 사는 강우영 법사가 잡아준다. 제는 마을회관 앞에 있는 나무에서 지낸다. 제 지내기 사흘 전에 안영교부터 마을회관을 지나 이발소에 이르기까지 금줄을 늘인다. 금줄은 마을 어른들이 왼새끼를 꼬아 그 사이에 흰종이를 끼운 것으로 마을을 가로질려 쳐야 하므로 수십 발을 꼬아야 한다. 황토는 깨끗한 곳에서 펴다가 신작로 양쪽에 죽 늘어놓는다. 이러한 제의 준비는 마을 남자들이 해준다. 금줄은 제가 끝난 후에도 걷지 않으며, 황토도 역시 자연스럽게 없어지도록 그대로 둔다.

    강우영 법사가 모든 것을 맡아서 하므로 제관을 따로 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제를 앞두고는 주민들 모두 궂은 것을 보지 않고, 생선이나 육류 등의 비린 음식을 먹지 않는 등의 금기를 지킨다. 그러나 제를 새로 지내기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았고, 또한 마을 주민이 제를 주관하지 않으므로 금기는 약한 편이다.

    제비는 마을 아주머니들에 중심이 되어 호당 일정액을 추렴하여 마련하는데, 한해에 약 60~70만원이 소요된다. 제물만을 맡아서 장만하는 사람을 따로 두어 그 사람이 장을 보아 제물을 장만한다. 이때 마을의 아낙네들이 함께 도와준다. 제물을 장만하는 동안 특별히 지켜야 하는 금기는 없으나 알아서 장을 보러 오갈 때 부정한 것을 보지 않으려고 애쓴다. 장은 대전시내의 시장을 이용하며, 통돼지, 시루떡, 막걸리, 삼색실과, 불밝이쌀, 명태, 과일 등을 마련하는데, 떡은 방앗간에 맞춘다. 제기는 별도로 마련해서 마을회관에 보관해두었다가 제 지낼 때만 사용한다.

    당일 밤 9시경이 되면 마을 어른들이 풍장을 치면서 마을회관을 출발하여 시계 반대방향으로 한바퀴를 돌아 다시 마을회관으로 돌아온다. 이는 마을 사람들에게 제사 지냄을 알리는 것으로, 풍장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하나 둘 제장으로 나온다. 사람들이 모이면, 길바닥에 자리를 깔고 제물을 진설한다. 제물 옆에는 모래를 담은 큰그릇을 놓는데, 여기에는 마을 주민들이 개인의 치성을 위해서 초를 꽂아둔다. 제의는 유사와 법사가 주관하는데, 유사가 술을 따르면 법사가 이어 축원을 하고, 이어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절을 한다. 마지막으로 법사가 마을소지를 올리면, 이어 각자 자기집의 안과 태평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소지를 올린다.

    이 마을 사람들은 집안에서 개별적으로 위하기 보다 거리제에 나와서 치성을 드리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때문에 거리제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운집한다. 정성껏 제를 지냈기 때문인지 그 후로는 아무런 해가 없었다고 한다.

    <김정예(여, 64세, T.581-2409)/황승자(여, 57세, T.581-9800)>

    ② 창명 거리제

    과거 안영교 지역에 큰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6.25이후 나무가 이유 없이 계속 죽었다. 마침 이곳을 지나가던 스님이 이것을 보고 이 마을의 젊은 남자가 죽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실제 마을의 젊은 남자들이 여럿 죽어서 새마을사업 때 과부들이 나와서 일을 했을 정도이다. 그래서 1950년대 후반부터 그러한 후한을 막기 위하여 거리제를 지내기 시작하였는데, 그 후로는 마을의 젊은 남자들이 죽지 않았다고 한다.

    제는 음력 정월 열사흗날 밤 8~9시경에 안영교 자리에 있는 버드나무에 지냈다. 안영교가 생기기 이전에 새뜸에서 창명을 오려면 유등천을 건너야 했는데, 그 곳에 큰 버드나무가 있었다. 1960년대에 유등천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 공사를 하면서 그 주변의 나무를 베어버리자 그 나무도 성장하지 못하고 죽었다. 이에 그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은행나무를 심고 그 곳에서 제를 지냈다. 그러나 올해(1997)에 안영교 공사로 인하여 나무를 다시 마을 안으로 옮겨 심고 제를 지내고 있다.

    제를 지내려면 준비해야 하는 것이 많은데, 가장 먼저 제 지내기 열흘 전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유사와 제관을 정한다. 유사는 여자로 음식장만을 맡으며, 제관은 남자로 제를 주관한다. 이들은 우선 부정이 없는 깨끗한 사람이어야 하나 무엇보다도 두 사람이 궁합이 맞아야 한다. 그래서 제관과 유사는 다른 가정의 사람일 수 있지만 식구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소지는 새뜸에서 거리제를 지내시는 강우영 법사가 맡고 있다. 예전에는 마을에 거주하던 스님이 맡아 했는데, 그 스님께서 돌아가셔서 2~3년 전부터는 강법사에게 의뢰하였다.

    일단 유사와 제관으로 선정되면 그들은 매일 목욕재계하며, 또한 부정한 것을 보지 않으려고 외출도 하지 않는다. 만약 부정한 것을 보았다면 유사와 제관을 바꾸어야 하며, 마을 내에 초상이 났다면 제를 물린다.

    일주일 전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합심하여 마을 제당 주변을 청소하고 은행나무에는 금줄을 두르고 황토를 뿌린다. 원새끼를 꼬아 흰종이를 끼워서 만든 금줄을 나무에 2~3번 정도 두르고, 나무 주변에는 황토를 빙 둘러 놓는다. 예전에는 유사집에 금줄을 두르고, 황토도 놓았으나 지금은 하지 않는다.

    제비는 마을 기금의 일부를 꺾어서 사용하며, 이 자금은 안영 유원지에서 수익금의 15%를 기부한 것을 모은 것이다. 현재 1,600만원이 예치되어 있어, 그 이자로 제를 지내고 있다. 기금이 없던 시절에는 풍물을 치면서 걸립을 하여 충당했다.

    제물은 유사가 제 지내기 하루 전에 보아온다. 삼색실과, 과일, 돼지머리, 명태 두 마리, 불밝이쌀, 시루떡, 막걸리, 메밀묵 등을 준비한다. 막걸리는 양조장에 부탁하여 가져오며, 메밀묵은 양념등을 하지 않고 그대로 올린다. 제기는 사기그릇으로 별도로 마련하여 마을회관에 보관하고 있는데, 이 그릇은 제 지낼 때만 사용한다.

    당일 저녁에 되면 마을 사람의 일부가 풍물을 치면서 은행나무 앞으로 나온다. 그려면 이 풍물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제장으로 하나 둘 나온다. 그 후 제물을 진설하고, 상 앞에 모래를 갖다 가로로 길게 깔고 마을 주민들이 가족 수 대로 초를 꽂는다. 그런 후 제관이 잔을 올리고 재배를 하면, 법사가 축원을 한다. 법사의 축원이 있으므로 따로 축은 읽지 않는다. 법사가 마을소지를 대표로 올리면, 각자 자신의 소지를 한 장씩 올린다. 그런 후 제물을 떼서 법사가 동서남북으로 뿌리며 해물리기를 한다. 이렇게 하여 제가 끝나면 마을회관으로 자리를 옮겨 음복을 하는데, 떡을 손바닥 크기로 잘라서 모든 이에게 한 덩이씩 준다. 마을의 단합 차원에서 제를 운영하므로 기독교 신자라 할지라도 제에 참석하여 구경한다.

    <권용백(남, 64세, T.581-8500, 현재 통장을 맡고 있으며, 여러 해동안 제관을 맡아 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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