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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집]은행동이야기
  • 문화동(文化洞) 과례 마을의 산신제
  • 문화동(文化洞) 과례 마을의 산신제

    (1) 조사지 개관

    문화동은 백제 때 우술군(雨述郡) 지역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비풍군(比豊郡)에 속한 지역이었다. 고려 시대에는 공주목에 속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과례리라 하여 공주목 유등천면에 속하였는데, ‘여지도서’를 보면 과례리는 호구 72, 인구 326명으로 나타난다. 고종 32년(1895)에는 회덕군 유천면이 되어 천근리(天根里), 옥산리(玉山里), 과례리(果禮里), 모산리 (牟山里), 노산리(老山里)등의 자연마을로 있다가, 1914년 대전군 유천면 과례리로 통합하였다. 그 뒤 1935년 대전부의 실시로 일부 지역이 대전부 문화정, 잔여지역은 1940년 대전부 연병정으로 편입되었다가, 1946년 문화동으로 되었다. 1989년 대전부가 시로 승격하여 문화동이 되고, 1977년 구제 실시로 중구 문화동이 되었다. 1989년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함에 따라 대전직할시 중구 문화동이 되었다. 문화동이란 명칭은 연병정을 개칭한 것이며, 1985년 11월 1일 문화1동과 문화2동으로 분동외었으며 각각의 동사무소가 소재하고 있다.

    이중 문화1동은 남쪽에 보문산을 등지고 사정동, 대사동과 접한 보문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쪽에는 대사동이, 동북쪽에는 문화2동, 북쪽으로는 중앙로를 경계로 오류동, 용두1동과 접하며, 서쪽으로는 유천2동, 산성동과 접하고 있다. 1993년 현재 문화1동은 면적이 2.07㎢이고, 4,263세대(인구 15,061명)로 29통 142반을 관할하고 있다.

    옛 지명인 과례리가 말하듯 문화1동은 교육. 문화기관이 밀집해 있어 대전직할시의 교육문화의 중심권을 형성하고 있다. 충남대하교 의과대학을 비롯하여 충남교육청, 대전과학고등학교, 한밭상업고등학교, 동산중. 고등학교, 대전직할시학생체육관 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외에도 많은 교육기관이 자리잡고 있으며, 한밭도서관, 시민회관, 문화원 등이 있다. 공공기관도 대전지방병무청, 대전지방원호청, 대전지방기상대, 서대전우체국 등이 자리잡고 있다.

    문화1동의 자연마을은 과례(果禮), 솥점말 등이 있다. 과례는 문화로에서 충남대학교 의과대학과 부속병원 사이로 난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솥점말을 지나 한밭도서관에 이르는 문화여자중학교와 과학 고등학교의 동쪽 산아래 지역의 마을이다. 고려 때 노거재(老居齎) 우징복(禹徵福)이 여기에 거주하면서 문필봉에 서당을 열고, 마을에서 차례를 잘 지키는 습관을 기르도록 되므로 사람들이 이 마을을 과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는 이 마을 뒷산이 괘등형(掛燈形 : 등잔을 건 형국)의 명당자리로, 괘등 아랫니므로 과례라 이름 지었다고도 하며, 마을에서 과일이 많이 나서 과례라 불렀다고도 한다. 문화동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며, 1950년에는 200여 가구가 거주하였다. 그 주변 지역은 전에는 충남대학교 캠퍼스가 있었으나 지금은 많은 교육기관들이 들어서 있다. 솥점말은 과례에서 대사동으로 가는 마을로 현재의 충남대학병원 자리 뒤의 지역이다. 예전에 산기슭에 있는 솔밭에서 솥을 주물로 만들어 팔았고, 그 뒤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그 곳을 솥점말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2) 제의 실태

    ② 과례 마을의 산신제

    예전에는 매일 밤마을 어른들이 징을 치고 다닐 정도로 호랑이 피해가 많았다. 이에 호환을 막기 위해서 공동으로 산신제를 지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실제 제를 지내기 시작한 후로는 호랑이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런데 6.25사변 이후 제를 지내던 굴참나무가 죽어서 그 이후로는 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

    제는 음력 정월 열나흗날 해가 진 후 올라가서 제를 지낸 후 자정 경이 되어 하산하였다. 마을 뒤에 있는 그다지 높지 않은 산에 오래된 굴참나무가 있어 이곳에서 해마다 제를 올렸다. 굴참나무는 6.25사변 이후 자연히 고사하였다. 6.25전쟁 때 인민군이 나무를 벤 적이 있는데, 그 잔재로 지금도 나무의 가운데가 비어 있다. 예전에는 나무 곁에 당집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쓰임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현재도 그 터는 확인할 수 있다.

    제를 앞두고 동네 어른들이 모여서 깨끗한 사람으로 가려서 제관과 축관을 뽑는다. 이때 제관은 여자로 뽑고, 축관은 남자로 뽑는데, 이들은 각기 운이 맞는 사람으로 반드시 부부일 필요는 없다. 이렇게 하여 제관이 선출되면, 그 사람은 자신의 집과 당산나무, 당집에 금줄을 두르고 황토를 뿌려 부정을 막는다. 그런 후 궂은 것을 안보고 궂은 자리에는 참석도 하지 않으며, 부정한 소문은 듣지도 않는다. 만약 궂은 것을 보거나 집에 일이 생겼다면 다른 사람으로 바꾼다. 또한 마을에 초상과 출산이 있으면 제를 미루어 좋은 날을 다시 받는다.

    제비는 어른들이 풍장을 치며 가가호호를 돌면서 성의껏 쌀과 돈을 걷어 마련한다. 제물은동네 어른들이 제 지내기 이틀 전에 장에 가서 보아 오는데, 제관이 나설 경우 혹여 궂은 것을 보아 부정탈까 하는 마음에서 어른들이 대신 하는 것이라고 한다. 제물은 막걸리, 돼지머리, 삼색실과, 나물, 탕, 명태, 불밝이쌀, 흰무리떡, 메 등을 사용하며, 이중 흰무리떡과 메는 제장에 올라가서 직접지어 올린다. 제기는 따로 마련하여 당집에 두고 제 지낼 때만 사용한다.

    해가 지면 제관과 축관은 제물을 지고 산으로 향한다. 제장에 도착해서는 먼저 흰무리떡과 메를 마련하며, 그것들이 마련되면 이어 제물을 진설한다. 제의 절차는 유교식으로 거행하며, 제관이 잔을 올리고 절을 한 후 축을 읽는다. 그 후 가구 수 대로 소지를 올려준다. 제의가 중단되지 40여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으므로 잔을 올리고 절을 하는 사람이 제관인지 축관인지 알지 못한다.

    <대전직할시사편찬위원회, 1994. pp.455~466./박옥순(여, 64세, T.583-7719)/표종현(남, 64세, T.582-7716)/ 윤천식(남, 64세, T.584-1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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