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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집]은행동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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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수동(無愁洞) 산신제, 거리제

    (1) 조사지 개관

    무수동은 보문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로 동쪽으로 구완동, 남쪽으로 목달동, 북쪽으로 사정동, 서쪽으로 침산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동북쪽 보문산 준령을 경계로 문화1동, 대사동, 부사동과 동계를 이룬다. 원래 물과 무쇠가 많이 나는 마을이라 하여 무쇠골 또는 수철리(水鐵里)라 부르던 곳인데, 조선조 숙종 때 대사간 권기(權棋)가 정착하면서, 그의 호를 무수옹(無愁翁)이라 하여 마을도 무수리라 부르게 된 지역이다.

    백제 때 우술군(雨述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비풍군(比豊郡)에 속한 지역이다. 조선시대는 공주목 산내면 무수리였다. 고종 32년(1895)에는 회덕군 산내면 무수동리로 편입되고, 1914년 대전군 산내면 무수리라 하였다. 1935년 대전부 설치로 무수리는 대덕군 산내면에 속하게 되었고, 1989년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함에 따라 중구 무수동으로 편입하였다. 현재 행정동은 산서동이다.

    무수동은 전체가 약 30여호 정도 거주하고 있으며, 안동 권씨의 동족마을을 이룬다. 안동 권씨가 이곳에 정착한 것은 약 300여년 정도가 되며, 현재 11대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에서 7~8호 정도만 배나무골, 중뜸, 구석말, 노진개, 보문골(보무골), 뒷말, 아랫말, 유희당뜸, 으능정이, 무수골 등이 있다. 구석말은 유희당뜸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무수동 동북쪽의 구석진 곳에 있다 하여 구석말, 구억말, 궝말 등로도 불린다. 이 구석말은 샘이 유명하다. 겨울에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온수가 솟아나고, 여름에는 찬샘이 된다고 한다. 노진개는 아랫말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뒷말의 앞들을 노진개라고 한다. 옛날에는 버드나무가 들어서 있었고, 그 곳에 술집이 많았다고 전한다.

    노징개, 노전개(盧田개)라고도 불린다. 뒷말은 아래말 옆 무수동 입구의 첫 동네이다. 지금은 무수동 입구의 첫 마을이지만, 옛날에는 유회당뜸을 중심으로 하였기 때문에 뒷말이 되었다. 배나무골은 이목동(梨木洞)이라고도 부르는데, 무수동 북동쪽 깊은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보문산에 있는 보문사 뒤에 있는 마을로 배나무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전주 이씨의 동족마을이었으나 지금은 폐촌되었다. 아랫말은 하촌(下村)이라고 하는데, 중뜸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유회당이 있는 마을로, 구석말 옆에 있고 무수동의 기점 마을이다. 유회당과 삼근정사, 별묘, 기궁재 등이 한 곳에 어울려 있는 곳이라 하여 유회당뜸이라고 부른다.

    으능정이는 중뜸의 건너편, 방산(防山 : 防寸山) 아래에 있다. 은행나무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밭가에 큰 은행나무 등걸이 남아 있다. 으능젱이, 으능정, 은행정(銀杏亭)이라고도 불린다. 중뜸은 중촌(中村)이라고도 불리는데, 유회당뜸과 아랫말 중간에 위치한 마을로 구완동으로 가는 길가 중간에 있다. 중뜸에는 합천 이씨 이춘계(李春啓, 고려의 재실이 있다. 무수골은 마을에서 무쇠가 많이 난다고 하여 무수골이라 한다. 또는 근심이 없는 동네라 하여 무수골이라고도 한다.

    무수동은 주로 벼농사를 짓고, 특수작물로는 수박을 재배한다. 시장과 병원은 대전시내를 이용하며, 학교는 산서초등하교를 다닌다. 마을에는 안동 권씨들이 정착하면서 세운 여경암 이라는 절이 있다. 또한 이 마을에는 교회가 없고, 교인도 없다.

    (2) 제의 실태

    ① 무수동의 산신제

    음력 정월 열나흗날이 되면 마을의 무사안녕과 농사의 풍년 그리고 집집마다 일년 동안 건강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금도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이 제의를 언제부터 지내왔느지는 알 수 없으나 조상대대로 이어 내려온 것이라고 하니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 산신제는 안동 권씨의 입향 이래 선조들을 위한 산신제로서 오랜 연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산신제의 연원은 최초의 입향조인 권이진(權以鎭)이 무수동에 세거하기 시작한 17세기 후반 또는 18세기 초로 상정할 수 있다. 그러나 권씨들이 설촌하기 이전에 이미 산신제가 치루어졌을 가능성도 크다. 한편 구전에 의하면 이 제의는 도깨비 불장난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한편 무수동의 산신제는 사회 경제적인 토대의 변화와 더불어 몇 차례의 커다란 변화를 겪으며 오늘에 이른다. 그 첫 번째의 모습은 유회당 권이진이 무수동에 세거하는 17세기 말~18세기 초까지의 기간으로 동계가 결성되기 직전인 19세기 초까지 약 1세기가 지나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무수동 안동 권씨가 저명 사족가문으로 위상을 떨치던 시기로 무수동은 그들에 의하여 비교적 안정된 사족 중심의 향촌질서를 유지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권씨가에서 회고하는 바와 같이 이 시기에 이르면 마을 풍속이 돈후하고 주민 상호간에 예의를 먼저 앞세워 산신을 제사하는 일에도 적극적이었을 것이다. 이 무렵의 산신제는 권씨가의 안정적인 사회 경제적인 기반을 바탕으로 해서 ‘산에 의지하여 사는 사람들은 마땅히 산신에게 제사를 드려야 한다. 라고 할만큼 확고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고례(古禮)에 따라서 충실히 산신제를 거행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여경암(餘慶庵)은 그러한 권씨들의 의식이 토대가 되어 건립된 유적이다.

    그에 뒤이은 시기는 19세기 중엽이다. 이 시기는 봉건체제의 급격한 해체와 맞물려 산신제 자체가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한 시기였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무수동의 마을 역사와 함께 거론될 성격의 것이기도 하다. 즉 이 시기에 권씨가의 주도하에 매년 지내오던 산신제는 무수동의 촌락생활이 피페하여 지고 주민 수가 격감되면서 그 전통을 유지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권충전(權忠銓)에 의하여 작성되는 무수계첩은 사실상 그러한 사정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사편찬위원회의 권영원 선생님이 번역한 무수동 동계 첩의 서문(序文)을 옮겨 적으면 아래와 같다.

    <무수동 동계 첩 머리글>

    운람산 아래에 마을이 있으니 무수라고 한다.

    마을의 시작은 어느 세대부터인지 알 수 없으나 우리 권가(權家)가 자리잡아 산 것으로 말한다면 상서공께서 선고 산소와 재실을 꾸밈으로부터 지금 5, 6대가 된지 오래다. 일가 친족이 시골에 모였고 뒷산 언덕에 나무도 다 아름드리가 되어 장씨(張氏) 영벽(靈壁)이 옛 그대로 된 것을 보면 마을이 대개 옛날에도 번성했었나 하였는데 수십년내에 석벽이 점점 쇠모(衰耗)되어 터전이 반이나 떨어져 사람들이 새이기에 힘입지 못하는 기상이 쓸쓸하여져 이에 가고 오는 운수에 말미암아 일찍이 늙은이들이 전하는 바를 들어보니 마을 민속이 돈후(敦厚)하여 예의(禮義)를 서로 앞서하니 다만 제사에 정성할 뿐만 아니라 먼저 산신(山神)에 제사지냄에 지극히 정성스럽고 공경히 하여 제물을 준비하거나 제관을 선택함에도 점쳐서 정하고 청력한 고기와 향기로운 술을 담그는데도 그 의식을 당연히 하였는데 근자에 와서 폐하고 시행치 아니하고 비록 행한다 해도 거칠고 예절을 차리지 아니하였다.

    아! 바다 안에 백성들의 근심 걱정과 노래 옮음도 또한 고기 폐백을 소홀하지만 산속에 사는 자는 마땅히 산신에 있어 구름이 나와 비를 일게 하고 그 재앙과 복됨이 사람에게 특이함이 있게 하도다, 여느 산 뫼뿌리 언덕에 한 마을의 흥하고 망하는데 제사지내는 까닭을 증험하기를 거짓하라 하랴.

    지난 갑진년에 마을 사람들이 돈과 곡식을 내어 다시 보내면서 “이 글을 잃어버리지 말고 해마다 행사할때마다 읽으라”고 가르쳐 주셨는데 겨우 두어 해가 지나서 또 실행하지 아니하다가 경술년부터는 이에 다시 의론을 하여 재물을 걷고 해 마다 산제(山祭)를 지내기로 약속하였으니 이 때문에 동계(洞界)가 있게 되었다. 동계의 물건은 지금에 다행히 더하면 더했지 덜할게 없으니 만일 과연 대중의 마음이 모아지게 된다면, 이로 인하여 해마다 이자를 꺾어 더하여 공경히 산신께 제사 지내고 그 나머지는 복되게 할 수 있는 일로 마을에 긴급한 일에 쓰이게 해야 옳다고 본다.

    산신은 진실로 산의 주신이 되고 우리 권씨 또한 동네의 주인이 된다. 이래서 내가 동계의 효과를 보게 하는데 사양치 아니하고 옛 늙은이의 말을 글로 새겨서 그 흥하고 쇠하는 감응을 보이게 하는 것을 또한 이와 같이 하노라.

     

    을묘년(乙卯年) 정월(正月) 보름날

    권충전(權忠銓)은 기록하노라.

    권씨들은 이제 상. 천민들의 도움이 없이는 더 이상 산신제를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이를 극복하기 위한 지구책으로, 상. 천민들을 포섭하는 동계(산제계)를 1851년에 재결성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에 앞서 1844년에도 재결성의 움직임이 없지는 않았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했음은 불안했던 당시의 무수동 사정을 그대로 대변한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19세기가 중엽의 재복구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침략으로 전통적인 마을 공동신앙은 점차 퇴조의 운명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을의 주도권을 장악했던 안동 권씨들의 문중 중심 지도이념도 새로운 문물의 수입과 그 일반화 경향속에서 도전을 받지 않을 수 없었고, 고유한 무수동 산신제의 성격도 점차 퇴색해 사실상 그 본연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로 연동 산신제의 성격도 점차 퇴색해 사실상 그 본연의 읨비를 잃어버렸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로 연결되는 세 번째의 변화 모습이라 할 것이다. 이 마을의 산신제는 1950년대 말 아예 중단되는 상황으로 연결된다. 물론 무수동의 산신제는 그 이후로도 마을의 산신제는 1950년대 말 아예 중단되는 상황으로 연결된다. 물론 무수동의 산신제는 그 이후로도 마을이 편치 못할 때에 간혹 지내기도 했지만 이것마저도 1982년을 끝으로 중단된 상태였다. 그러나 최근 산신제를 지내자는 여론이 높아져서 1991년에 산신제를 부활하여 옛 모습을 재현해 가고 있다.

    새롭게 전통을 이어가는 무수동의 산신제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는 윗말의 배산인 운람산(雲嵐山) 중턱 날근재에 위치한 산제당에서 지낸다. 특별한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평평한 곳을 정해두고 제를 지내고 있다. 제를 지내기 전에 미리 장정들이 잡초들을 제거하여 제장을 조성하는데 한나절이 소요된다고 한다. 약 1950년대 중반 까지도 단칸으로 된 당집이 있었다. 그러나 산신제가 중단되면서 당집 역시 철거하였고, 지금은 예전에 당집이 있던 자리에서 제를 지내고 있다.

    제를 앞두고 개별적으로 각자 자신의 집을 청소한다. 그 이외에도 제 지내기 전날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산제당을 청소하며, 유사와 깨끗한 사람들이 모여 샘도 품는다. 이 샘은 산제당 옆에 위치해 있는데, 평상시에는 사용하지 않고, 단지 제 지낼 때 유사들이 손과 얼굴을 닦는 데만 사용한다.

    과거에는 마을 입구와 제장에 금줄을 드리우고, 황토를 뿌렸으나 근래에는 모두 하지 않는다.

    당시 금줄은 유사가 꼬았는데, 왼새끼로 꼬아 한지를 끼워서 사용했다. 이렇게 간소화된 것은 일제시대 이후의 일로 오래 전부터 그러한 전통이 소멸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가을걷이가 대강 마무리 되면 동계를 열어 산신제를 전담할 유사를 선출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사는 일제시대 까지도 생기 복덕을 보아 상유사, 하유사, 나무유사인 시초를 각기 한명씩 선출했다. 그리고 각각의 유사는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안동 권씨에 거행되는 산신제에서는 상. 하유사에 관계없이 제관, 축관, 음식 유사를 선정한다. 일부에는 도유사와 일반 유사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유사를 뽑을 때는 상주나 임산부가 있는 집은 부정하다 하여 제외한다.

    제관이나 축관으로 선정되면 일주일 전부터 매일 찬물로 목욕재계하고 술. 담배 등을 삼간 채 정성을 드리며, 제관의 집에는 부정한 사람이 출입하지 못하도록 금줄을 치고 황토를 편다. 유사로 선출되어 정성껏 제의를 드리면 일년내내 재수가 좋다고 하여 유사로 선출되는 것은 꺼리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도 부정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하는데, 특히 개, 닭 등을 살생하지 않는다. 만약 마을에 부정한 일이 생겼다면 제를 연기한다. 부정은 생삼사칠(生三死七)이라고 하여, 산부정(출산)은 사흘을 가리고, 죽은 부정은 7일을 가린다. 따라서 해당 기간이 최소한 지나야 부정이 가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제를 정성껏 잘 모셨기에 6.25사변때 마을에 아무런 피해가 없었으며, 다친 사람도 없었다.

    제비는 산제답으로 내려오는 동답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어, 매년 여기에서 나오는 도자ㅣ를 받아 충당했다. 동계첩에 의하면 산제답은 목달리 역골에 3두락이 공동재산으로 전해져 오고 있어서 그곳에서 2석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1950년대 말 동계가 파계가 되자 동답 역시 처분하여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재는 유사가 제의 4~5일 전에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정성껏 돈이나 쌀로 거두어 마련하며, 동계 기금의 일부를 보조한다. 과거에는 풍물을 치고 다니면서 집집마다 지신도 밟아 주었으나 지금은 풍물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부정한 집에서는 추렴을 하지 않는다. 이렇게 추렴을 하면 쌀 1~2가마 정도의 값에 해당되는 비용이 마련된다.

    제물은 유사가 음력 열흘 전에 대전 시내에 가서 구입해 온다. 유사 부인이 마련해 주는데, 이때 제물 마련하는데 사용하는 물은 유사집의 물을 사용해도 괜찮으나 시간상 자정이 지난 뒤에 새로 물을 받아 사용한다. 이렇게 해야만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깨끗한 물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제물은 떡, 술, 삼색실과, 배, 포, 돼지머리, 나물, 메, 탕, 식혜, 불밝이쌀, 정화수, 숟가락 다섯벌, 향, 메밀묵 등을 마련하며, 떡은 다섯 되 분량으로 백설기를 찌어 시루채 올린다. 떡이 익은 후 떡 표면에 김이 올라온 자국이 많으면 동네가 잘 될 징조라고 여긴다. 술은 일주일 전에 유사가 담가 두었다가 사용한다. 나물은 생채와 숙채 두 가지를 사용하는데, 이때 고춧가루 등의 양념을 사용하지 않으며, 간도 보지 않는다. 탕은 3탕으로, 우(羽, 닭고기), 모(毛, 쇠고기), 인(鱗, 멸치)등을 넣고 각기 끊인다. 식혜는 술을 먹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 올린다. 그리고 삼색실과와 과일은 제상에 올려놓을 때 깎지 않고 깨끗하게 닦아서 그냥 올린다.

    제기는 따로 마련된 것이 있어 그것을 사용하는데, 제가 끝나고 나면 도유사가 보관했다가 이듬해에 다른 도유사에게 넘겨준다. 제기는 본래 사기였는데, 중년에 놋그릇으로 바뀌었다.

    예전에는 매년 산신 하강일을 가려 제일을 선정하되,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섣달 그믐날 저녁(정월 초하루 새벽)에 산신제를 지낸다. 그리하여 당일 아침이 되면 제관은 산신당으로 올라가는 길을 뚫고 산제당과 샘 주변을 깨끗이 청소한다. 그리고 왼새끼를 꼬아 금줄을 치고 황토를 편 다음 음식을 준비하는데 사용할 산제당 샘물을 깨끗이 품고 내려온다. 자정이 가까워오면 유사와 축관, 제물을 준비하는 사람은 산제당으로 올라가 새로 고인 샘물로 밥을 짓고 미리 준비한 제물을 진설한다. 그러나 이러한 준비 절차는 몇 차례에 걸쳐 산신제가 중단되고 이를 다시 복구하는 과정에서 간소화되어, 최근에는 금줄과 황토는 생략되고 제물도 음식유사로 선정된 과정에서 일정 준비하여 올라간다.

    당일 제장에 오르기 전에 유사 일행은 목욕재계를 하고 제장으로 오른다. 이윽고 밤 10시경이 되면 유사 일행은 운람산의 제장으로 향한다. 제장에 도착한 유사는 먼저 샘물을 이용하여 얼굴과 손을 다시 한 번 닦는다. 그런 후 제물을 진설하고 자정을 기해서 제를 올린다.

    제물은 다음과 같이 진설한다.

     

     

    o 술잔

    o 메 o 시접

    o 메밀묵 o 돼지머리 흰무리 떡 o

    o 고기찜 나물 o

    o 명태포 o 대추 o 밤 o 곶감 식혜 o

     

     

    o 향합 o 향로 o 술병

     

    제의는 유교식 제의로 거행되는데,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자리에 나가 강신한다.(항상 앞에 나가 끊어 앉아서)

    2. 향을 피워 올린다.(술을 따라 올려 땅에 붓고 엎드렸다 일어난다)

    3. 참신한다.(허리를 굽혀 두 번 절하고 일어난다)

    4. 술잔을 드린다.

    5. 끓어 앉아 축을 읽는다.

    6. 사신한다.(허리를 굽혀 두 번 절하고 일어난다)

    7. 분축한다.(축을 불에 사르고 예를 마친다)

    8. 소지를 올린다.(집집마다 소원성취 올려주고 동네 무사태평을 올린다 : 이는 지금의 속례이다)

    이를 풀어보면 먼저 신령이 내리기를 기다렸다가 무릎을 끓고 향불을 피운 다음 산신에게 제의를 알리는 뜻에서 퇴주를 붓고 절을 한다. 그런 후 참신한 뒤 경건한 마음으로 재배를 하고 제주를 올리고, 이어서 축문을 읽는다. 축문은 1851년에 수계시에 권충전(權忠銓)이 지은 것이며, 150여년이 지난 지금도 산제시에는 이 축문을 사용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상천민(常賤民)이 축관이 되었을 때 읽었던 축문도 있는데, 이 두 축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

    ***

    위의 축문은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기년 차례 아무 해 정월에 간지는 초하루요 며칠 간지에 유학 권 아무는 감히 밝혀 운람 산신님께 아뢰옵나이다. 비옵건대 우리들은 대대로 이곳에 살면서 여기에다 샘 파고 여기에서 농사지으면서 산신님의 경사를 이렇게 힘입었사옵니다. 이에 옛 예절을 좇아서 공손히 새로운 의식을 꾸미고 날을 가리어 돈을 걷음에도 대중들이 이의하는 말도 없습니다.

    돼지머리도 상하지 않아 향기가 동이에 가지런히 오르옵는데 모두 정성을 드리면서 각기 그 사정을 비오니 상서롭지 못함을 꾸짖어 금하옵시고 기리 많은 복을 주시옵소서, 비옵나니 원컨대 높으신 신령님 거의다 드시옵소서.

    이상에서 보았듯이 동계첩에는 권씨가에서 상유사로 선정되었을 때 읽는 한문으로 된 축문과 유사시 상천민이 제관으로 선정되었을 때 읽는 한글 축문이 위와 같은 형태로 동시에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러한 구분은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동계 결성 밑 산신제를 둘러싼 상. 하민 간의 역할분담이 반영되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기 때문에 주목된다. 뿐만 아니라 산신제 축문은 일반적으로 동제관련 축문에 등장하는 내용들, 곧 마을의 안녕과 농사의 풍년, 질병 퇴치, 우마창성(牛馬昌盛), 우순풍조(雨順風調) 등의 염원을 기록하고 있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다시 말해 산신제 축문에는 운람산신의 영험으로 무수동에 세거하게 된 내력을 간략하게 언급하고, 이에 따라 고례(古禮)를 참조하여 산신을 제사하는 새로운 예를 닦았음을 밝히고 있다. 아울러 동계를 결성함에 동민들이 별다른 이의가 없었음을 강조하고, 이로써 정성스럽게 제물을 준비하여 산신을 흠향함으로써 마을의 영석다지(永錫多祉)를 기원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상 축문을 읽고 나면 제관과 축관은 재배하고 소지를 올린다. 소지는 제관과 축관이 함께 올리는데, 먼저 만동소지를 올리고, 이어서 나이 순서대로 호주소지를 올리는데, 초상을 당한 가정의 소지는 올리지 않는다. 따라서 예전에 호구수가 많았을 때에는 소지를 올리는데 만도 서너 시간이 소요되었을 정도였다. 이때 소지가 높이 올라가게 되면 좋다고 여긴다. 호주소지를 올린 이후에는 농사가 잘 되게 해달라고 소지를 한 장 올리고, 동물소지도 올린다. 동물소지는 소, 개, 돼지, 닭의 순서로 각기 한 장씩 올려준다. 이렇게 하면 모든 절차가 끝이 나는데, 제가 끝났다는 것을 신령에게 알리기 위해서 술 한 잔을 올리고, 젓가락과 숟가락 다섯 벌을 그릇에 담아 놓고 절을 한다. 그런 후 제관과 그의 부인(음식을 담당했던 부인)은 약간의 제물을 준비하여 산제샘이 있는 곳으로 가서 유황제를 지내고 하산한다.

    제에 소요된 시간은 2시간 정도이다. 제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 중 젊은 사람이 바가지에 음식을 조금씩 떼어서 넣고 사방에 뿌린다. 이는 잡신들을 풀어먹이기 우힌 것이다. 또한 음복을 하기 전에 도유사가 축문을 태우고, 철상하여 마을로 내려와서 마을 사람들과 아랫말 동구 밖으로 나가 간단하게 거리제를 지내는 것으로 모든 제의 절차를 마감한다. 주민들에 의하면 예전에는 산신제를 지낸 제물은 집에 그대로 두고 이튿날 날이 밝으면 유사의 집에서 함께 음복을 하였다고 한다.

    ② 참고자료 : 대덕군 산내면 무수리(無愁里) 산제(현 대전 중구 무수동)

    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정월 보름에 산신제를 지낸다. 마을 동쪽 운람산정(雲嵐山頂)에 남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정월 보름에 산신제를 지낸다. 마을 동쪽 운람산정(雲嵐山頂)에 남향을 하고 있는 산신당이 있다. 산신당은 와가(瓦家)로 건평 1칸이다. 내부에는 그림으로 되어 있는 신체를 모시고 있으며, 그 밖의 것은 없다. 제관은 상당(上堂) 당산주(堂山主)가 겸임하는데, 40대 이상의 부정이 없는 남자 후보자들 중에서 선정한다. 당산주(堂山主)로 선정되면 근신(謹愼)하며, 목욕재계한다. 제비는 그해 당산주(堂山主)가 부담한다. 제물은 백병(白餠). 백반(白飯), 과실(果實) 등을 준비한다. 제를 지낼 때에는 당산주(堂山主) 이외에도 40대 이상의 마을 남자 유지들이 참석한다. 당일 자정이 되면 입산하여 제를 지내고, 제가 끝나면 촛불을 밝히고 정중히 기도한다. 그리고 첫닭이 울면 비로소 철상하고 내려온다. 음복은 다음날 부정 없는 사람들만 유사집에 모여서 행한다. (<전국부락제당조사질문지-충남편(1)>, 한국 민속박물관, 1967에서 인용)

    ③ 무수동의 거리제

    산신제를 지낸 뒤 하산하여 동구 밖에 허당으로 모셔진 장승과 솟대에서 거리제를 지냈다.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무수동의 솟대는 오릿대라 불렸으며, 길다란 장대 위에 오리 모양의 새를 얹어 놓은 형태였다. 시편위의 구???영원 선생님이 7~8세 때에 동구밖에 장승과 함께 서 있는 솟대를 보았다고 하며, 어느 해에는 보이지 않기도 했다고 하니, 솟대가 존재했음은 분명하다.

    장대에는 왼새끼를 감아 두었는데, 인근 지역에서 보는 용트림과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 솟대는 이미 해방되기 이전에 소멸된 것으로 전한다. 또 다른 주민에 의하면 매년 거리제를 지낼 때에는 나무로 오리를 깎아서 장승 위에 올려놓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무수동에 솟대가 존재했음은 분명한 것 같고, 양자간의 견해 차이는 시대적인 차이 즉 솟대가 소멸되어 가는 과정이 반영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다시 말해 마을에서 장승이나 솟대를 세우는 경우 대개 1년에 한 번씩 갈아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산림법이 엄한 일제시대 에는 매년 장승. 솟대를 깎아 세우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산림법이 엄한 일제시대 에는 매년 장승. 솟대를 깎아 세우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장승목이나 솟대목을 구할 수 있다 하더라도 매년 갈아 세우는 일이 번거롭기 때문에, 마을에 따라서는 나무장승을 돌장승으로 바꾸거나 3~4년만에 한번씩 세우기도 한다. 따라서 무수동에 장간의 솟대가 있었다는 것과 담반 거리제를 지낼 때 나무오리를 깎아 얹어 놓았다는 증언은 시대적인 배경이 상이한 데서 오는 차이로 보여진다. 즉 무수동에서 매년 솟대를 갈아 세웠음은 이의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솟대의 종교적인 상징성이 퇴색되면서 소멸되기 직전에는 장대를 세우지 않고 나무오리만을 깎아서 장승 위에 올려놓기도 하였던 모양이다.

    한편 무수동의 장승은 전형적인 선돌형 장승으로 옛 동구 밖에 두기, 낙동모텡이에 두 기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1m내외의 작은 것이었고, 최근까지 남아 있던 돌장승 1기는 높이 160cm, 둘레 120cm 가량 되는 직사각형의 선돌이었다. 1970년대 초에 조사된 동제 보고서에는 당시 무수동 돌장승 사진이 실려 있다.(이은창, ?금강유역의 부락제연구?, ?장엄지헌영선생화갑기념논총?, 1971.) 그러나 20년전 권씨가의 한 주민이 장승을 뽑아 다리를 놓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당시 장승을 뽑을 때 “네 이놈, 이제 필요 없으니 냉큼 큰 바위 날망으로 올라가 앉거라, 이 돌은 내가 가져다가 다리를 놓겠다”고 호통을 친 뒤 장승을 뽑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후 장승을 뽑은 사람의 가족이 시름시름 앓아누워 무당에게 찾아가 물으니, 장승을 건드렸기 때문이라 하여 다시 마을 어귀에 세워 놓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장승마저도 1991년에 마을의 도로를 넓히면서 흙속에 묻히고 말았다.

    제일은 매년 음력 정월 열 나흗날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초 한국전쟁이 나면서 거리제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정확한 고증이 어렵고, 다만 거리제에 대한 대강의 절차만 전하고 있을 뿐이다.

    즉 거리제는 일주일 전쯤 산신제 유사와는 별도로 정갈한 사람으로 제관으로 선정하여 지냈다. 제의 비용은 호구마다 쌀이나 돈을 각출하여 충당하되, 권씨가 제외한 타성들이 주축이 되어 걸립에 나섰다. 제물은 산신제와 동일하였으나 돼지머리는 사용하지 않고, 또한 산시제와는 달리 부정하지 않은 사람이면 누구라도 참석하여 마을과 가정의 평안을 빌었다. 그리하여 거리제를 지내는 날은 초저녁부터 꽹과리, 징, 장고, 북 등 사물을 앞세워 풍장을 치고 한 바퀴 돌아 액운을 물리친 뒤 장승 앞으로 가서 거리제를 지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거리제는 과거 무수동에 거주했던 타성(옛 상천민) 주민들에 의한 제의였다는 것이다. 곧 산신제가 조선 후기 이해 사족인 권씨가의 주도하에 거행되었던 제의라면, 거리제는 상천민에 의한 제의였다.

    실제 권씨가에서는 거리제가 중단되기 직전까지도 거의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전한다.

    따라서 과거 무수동의 동제는 산신제와 거리제라는 이중구조로 이루어졌었고, 그것은 전동민이 참여하는 대동 제의가 아니라, 철저하게 신분 관계에 의해 규정된 차별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즉 권씨가에서는 그들 나름대로의 권위의식과 하민을 다스리기 위한 지배구조도 산신제를 활용한 반면, 타성인 상천민들은 거리제를 통하여 유대를 강화해 나갔던 측면을 배제할 수 없으리라고 본다.

    (3) 그 밖의 현황

    무수동 마을 사람들은 비가 오지 않으면 ‘용구덩이’라고 하는 물웅덩이에서 제물을 정성껏 준비하여 기우제를 지냈다. 그 밖에 전염병이 돌 때면 다른 마을 사람들이 이 마을에 와서 디딜방아 많이 훔쳐 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마을에서는 그러한 행위를 한적이 없다고 한다.

    <대전직할시 향토사료관, 1993. pp65~67./국립민속박물관, 1993. pp253~256./문화체육부, 한국향토사연구 전국협의회, 1995. “보문산기슭의 선비마을”, pp.97~105./대전직할시사편찬위원회, 1994. 492~499. 강성복, 1994. ‘조선후기 대전 무수동 동계와 동제의 성격’ “문화연구”/(우리불교문화연구소)/권병원(남, 66세, 1997년 현재, T.285-2251, 9대째 거주하며, 유사경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