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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집]은행동이야기
  • 옥계동(玉溪洞) 탑제
  • 옥계동(玉溪洞) 탑제

    (1) 조사지 개관

    옥계동은 중구의 남부에 위치하고 있어 동북으로는 대전천을 경계로 가오동이 접해 있고, 동으로는 대성동, 대별동과 만나고, 남으로는 이사동과 경계를 이루며, 남서쪽으로는 호동이 자리잡고 있다.

    백제 때는 우술군(雨述郡) 지역에 속했었고, 신라 때는 비풍군(比豊郡)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공주목 산내면의 지역으로 있었으며, 고종 32년(1895)에는 회덕군 산내면 옥계리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전군 외남면 옥계리가 되었다가 1935년 대전부의 설치로 대덕군 유천면 옥계리로 편입되었다. 그 뒤 1963년 대전시의 구역 확장으로 대전시 석교동에 편입되어 옥계동의 자연마을은 기와마루, 애바우, 용머리(龍頭) 등이 있다. 기와마루는 옥계교 부근 옥계아파트 일대 대전천변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기와집이 많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에 기와를 굽던 마을이므로 기와마루, 와리(瓦里), 재마루라고 부르고, 금산 태봉치(胎峯峙)에서 흐르는 대전천의 물이 용머리를 적시는데 이것이 옥계수(玉溪水)와 같다고 하여 옥계라고도 한다.

    또한 지와마루, 개와마루, 잿마루, 새마루라고도 부른다. 애바우는 애바우에서 무암천쪽 아래에 있다. 용머리는 용두라고도 하는데, 옥계동 천주교회 서쪽 산밑 부근에 있는 마을이다. 바위의 형상이 아기 같다 하여 아기바위라 한데서 애바우 혹은 애바우말이라고도 한다. 용머리는 용두라고도 하는데, 옥계동 천주교회 서쪽 산밑 부근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뒷산이 튀어나와 둠벙에 이어진 모양이 용이 물을 먹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용머리라고 한다.

    옥계동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1972년 도시계획을 하면서부터 이다. 그 이전에는 마을이 작았으며, 약 40여호가 거주하고 있었다. 현재 옥계동은 학교, 병원, 시장 등을 갖추고 있으며, 교통도 편리하다.

    (2) 제의 실태

    ① 옥계동의 탑제

    예전부터 내려오던 것을 이어서 음력 정월 열나흗날이 되면 의례껏 탑제를 지냈다. 이 제는 동네에 잡병이 들어오지 않고 1년을 무사하게 지내는데 목적을 두었다. 그러나 1972년 도시계획으로 도시화가 되면서 제의가 소홀하게 여겨지기 시작하였으며, 그 후 2~3년간 이어지다가 중단되었다. 실제적인 이유는 도시계획이 되면서 다른 동네 사람이 제장의 땅을 환지(자신의 땅에 도로가 나면서 보상으로 받은 땅)로 받아서 그곳에 집을 짓을 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후 공사를 하던 그 사람은 병이 나서 심하게 앓았으나 집을 짓고 그곳에 입주하여 지금까지 거주하고 있다.

    탑이 있다 하여 ‘탑거리’라 불리는 마을 입구 대전천변 논 가운데에 탑 두기가 위치했다. 탑 사이에는 비석이 있었고, 탑은 소나무에 둘러 싸여 있었다. 탑 위에는 정형화되지 않은 자연석이 각 법 규모가 컸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주택이 들어서서 그 위치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제를 앞두고 주민들은 각자 자신의 집 주변을 청소하였다. 집이 드문드문 있었던 까닭에 마을 전체를 청소한다는 것은 무리였다고 한다. 그러나 제장은 일주일 전부터 제관(지주)이 청소한다. 그런 후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려두어 부정을 방지했다.

    금줄은 제 지내기 열흘 전에 제관이 직접 꼬아서 쳤는데, 금줄에 사용되는 짚은 깨끗한 것만을 가려서 사용하였다. 금줄에는 가늘게 창호지를 잘라 끼우는데, 그 이유는 특별함을 표시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금줄은 제의 일주일 전에 제장과 제관집에 드리운다. 탑과 소나무를 빙둘러 금줄을 드리웠기에 멀리서 보아도 제장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고 한다. 황토는 제관이 일주일 전에 동네 뒷산인 장고개에서 퍼다가 제장과 제관집에 피운다. 탑에는 두 무더기만을 피웠고, 제관집에는 양쪽에 각기 세 무더기씩 모두 여섯 무더기를 피웠다. 제관집에 사용한 금줄과 황토는 제의가 끝나면 곧바로 제거한다.

    정월에 학식이 있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제관을 선출한다. 이때는 집안에 임산부나 환자가 있고, 깨끗하지 못한 집은 제외한다. 그런 후 책력을 보아 생기복덕이 닿는 사람을 선정한다. 이렇게 선출된 사람을 마을에서는 ‘지주(제주)’라고 불렀다. 일단 지주로 뽑히면 거부하지 않고 모두 제를 주관하는데, 이는 제의를 잘 지내면 복이 있고 재수가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일단 지주로 선출된 후에는 제 지내기 전까지 부정 타지 않도록 근신한다. 우선 바깥출입을 자제하고, 집안에서 근신하였다. 그리고 부부간에 각방을 사용하며, 부부관계를 금했다. 또한 비린 음식을 먹지 않았다. 이러한 금기는 제를 사흘 전부터 보다 본격화된다. 지주는 그날부터 매일 목욕재계를 해야 했다. 만약 제관이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마을에 좋지 못한 일이 발생하고, 파란이 생기게 된다. 그러한 일이 생기면 의례껏 거리제를 잘못하여 그러한 일이 발생하였다고 욕을 먹으므로 미리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다.

    이에 반해 주민들은 특별히 지켜야 하는 금기는 없다. 그러나 제관집에 함부로 드나들지 않으며, 스스로도 부정타지 않도록 주의한다. 만약 제를 앞두고 사흘 전에 사람이 사망했다면 그 해에는 제의를 지내지 않는다.

    제비는 지주가 제의 3~4일 전에 직접 거두어서 사용한다. 집집마다 성의껏 내며, 부정한 집에서는 추렴하지 않는다. 제비가 마련되면 지주가 장을 보러간다. 주로 대전 중앙 시장을 이용하였으며 제물과 함께 제기도 구입하였다. 이때 특별히 준수해야 하는 금기사항은 없다. 새로 구입한 제기는 제를 지낸 후에 제주가 사용한다.

    장을 보아오면 그 제물은 지주네 집에 보관해 두었다가 지주와 지주부인이 마련하였다. 제물에는 고춧가루 등의 양념을 사용하지 않으며, 간도 보지 않았다. 제물을 만들기 전에는 반드시 목욕을 해야 한다. 제물로는 떡(백설기 3되 3흡 분량), 술(막걸리), 사과, 배, 삼색실과, 나물, 포 두 마리, 정한수, 불밝이쌀 등을 마련하는데, 포는 크고 흠집이 없는 것을 사용하며, 나물은 고사리, 사취나물, 숙주나물 등으로 세 가지를 장만한다. 그리고 숟가락을 두 벌 놓고 향을 꽂아둔다.

    정월 열나흗날 밤11시가 되면 제 지낼 준비를 해서 제장으로 이동한다. 제물은 지주와 깨끗한 사람이 가지고 올라가서 사에 진설한다. 그리고는 향을 피우고 불을 켠다. 제의는 유교식으로 진행되며, 강신-헌작-재배의 순으로 진행한다. 축은 1970년대 초반까지는 읽었으나 그 후로는 읽지 않고 소지만을 올렸다. 과거에 사용되었던 축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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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지는 지주가 올리며, 먼저 탑 거리 소지를 올리고, 이어 개인소지를 올린다. 개인소지는 호당 한 장씩 호주소지를 올려주며, 나이가 많은 사람부터 올려준다. 이때 소지가 높이 타 올라가면 좋다고 여기는데, 대부분 높이 잘 올라간다. 이렇게 하여 제를 마치고는 탑 위에 음식을 조금씩 떼어 놓는다. 이 음식은 다음날 보면 없어졌는데, 당시는 잘살지 못하던 시절이기에 탑 위에 놓은 음식을 먹기 위해서 오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절차로 진행된 제의는 약 1시간 반 정도가 소요되며, 제를 마친 이후에는 그 자리에서 제물로 간단하게 음복을 한다. 이어 날이 밝으면 마을 사람들은 지주집에 모여서 잔치를 벌인다.

    (3) 그 밖의 현황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서는 산신제와 거리제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제의가 있었다. 우선 전염병이 돌면 병이 이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디딜방아를 가져다가 뱅이를 하였다. 마을에 있던 디딜방아를 삼거리에 뒤집어서 세워놓고 여자 속곳을 씌워 놓는데, 삼거리는 대성리(대성동)와 대전, 산내로 가는 길이며, 간혹 디딜방아를 개울에 세우기도 했다.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이 마을에서도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기 때문에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돼지 한 마리를 잡고 떡과 삼색실과를 마련하여 마을 뒷산에 올라 가서 비가 오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렇게 기우제를 지내면 맑았던 날씨가 갑자기 흐려지면서 비가 오는 등의 효과가 나타났다고 한다.

    <대전문화원, 1988. pp95~97./대전직할시사편찬위원회, 1994. pp.452~455./김완성(남, 65세, 1997년 현재, T.272-4865, 3대째 거주)/김문수(남, 71세, 1997년 현재, T.271-1349, 유사경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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