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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집]은행동이야기
  • 금동(錦洞) 산신제, 용왕제, 거리제
  • 금동(錦洞) 산신제, 용왕제, 거리제

    (1) 조사지 개관

    금동은 동구 산내동인 장척동을 경계로 구계를 이루고, 북쪽으로는 중구 목달동과 서쪽으로는 정생동과 경계를 이루며, 남쪽으로는 어남동과 만난다. 금동은 금동천의 맑은 물이 흘러 산세가 비단같이 아름다운 곳으로 금뎅이, 초댕이, 금동이라 불리던 곳으로 금동(金洞)으로도 쓰였다.

    백제 때는 우술군(雨述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비풍군(比豊郡)에 소속된 지역으로 고려와 조선조에는 공주목에 편입되었다. 그 후 금동이라 하여 공주목 산내면에 속하였다가 조선말 고종 32년(1895)에는 회덕군 산내면에 편입되어 금동리라고 하였다. 현재 행정동은 산서동이다.

    금동의 자연마을은 괴봉산(굉이산), 금덩이(금뎅이, 금딩이, 금동이), 모링이, 양지말, 웃말(상촌), 음지말 등이 있다. 괴봉산은 굉이산이라고도 한다. 고양이 형국의 산인 광이산 아래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금덩이는 금데이, 금딩이, 금동이라고도 불린다. 마을 앞으로 금동천이 흐르고, 금동이 고개 아래 아늑하게 자리 잡은 마을이다. 금덩이는 모링이를 지나서 있는데, 양지말과 음지말을 합하여 일컫는 지명이다. 양지말은 금동 음지마을의 도로 건너 쪽편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양지말의 남서쪽 금동천의 건너편에 위치한 이름이다. 북동쪽으로 붙은 산에 햇볕이 가려 그늘이 많아지는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현지 주민들은 대개 은저골이라고 부른다. 모링이는 모렝이, 모랭이라고도 부르는데, 양지말 남쪽에 위치해 있는 마을이며, 6호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웃말은 양지말에서 동쪽으로 지대가 높은 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금동에는 약 10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다른 성씨에 비해서 은진 송씨가 많이 거주하고 있으며, 마을에는 송씨 집안의 8~13대까지 위패를 모신 금무사라는 사당이 있다.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곳은 산골이라 밭이 많은데, 토양이 거먹당(검은땅의 지역어)이라 토질이 좋은 편이라고 한다. 광복 이전에는 대부분 소작이었고, 일본인들의 땅이 많았다고 하는데, 현재는 자작농이다. 또한 농한기에는 시내로 나가 건축일을 하기도 한다.

    (2) 제의 실태

    ① 금동의 산신제

    금동에서 산신제를 언제부터 지내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주민들이 설촌하면서부터 지내왔을 것이라고 하니 그렇게 추정할 뿐이다. 산신제는 금동의 4개 자연마을이 합심하여 지낸다. 이 마을에서 위하는 신령은 ‘석태산의 산신령’이다.

    제장은 마을 남쪽 석태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데, 상탕, 중탕, 하탕으로 구분되어 있다. 맨 아래에 자리 잡은 곳을 하탕, 중간에 자리 잡고 있는 곳을 중탕, 맨 위에 자리 잡고 있는 곳을 상탕이라 한다. 상탕의 부근에는 아름드리 큰 나무가 있고, 중탕에는 커다란 돌이 있으며, 하탕에는 옆에 한 평 남짓한 직사각형의 당집이 있다. 이 당집은 1977년도에 블록을 이용하여 건립하였으며, 슬레이트로 지붕을 얹었고, 내부에는 제기나 제의 거행시 소요되는 각종 물품을 보관하고 있다.

    제 지내기 사흘 전에는 마을 청소를 한다. 금줄은 유사 집과 산신당, 샘에 치게 되고 황토는 유사 집에만 뿌린다. 그러나 근래에는 유사집에도 금줄만 치고 황토는 뿌리지 않고 있다. 샘 청소는 유사가 혼자 하게 되는데, 사흘 동안 하루에 한 번 씩 품는다.

    산제를 주관하는 사람을 ‘유사’라고 부르며, 제 지내기 보름 전에 마을에서 한학을 하시는 분이 생기 복덕을 보아 선출한다. 그러나 생기 복덕이 닿아도 집안에 환자나 출산이 있고, 짐승이 새끼를 낳아도 유사를 맡기지 않는다. 이외에도 축관을 따로 선출한다. 그러나 유사가 한문을 잘 알면 축관의 역할도 겸할 수 있으므로, 축관은 따로 선출하지 않는다. 유사로 선출이 되며, 문 밖 출입을 가벼이 하면 안 되고, 부부간의 합방도 하지 않는다. 또 사흘 전부터는 하루에 한 번 씩 목욕재계를 한다. 이렇듯 유사가 되면 지켜야 하는 것이 많아 번거롭고 어렵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유사 맡기를 꺼린다. 그래서 최근에서는 유사에게 수고했다고 10만 원 가량을 수고비로 준다.

    유사를 맡아 산제를 지내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은 하지만 유사를 맡기를 거절하면 오히려 해를 당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일단 제를 맡았으면 온갖 정성을 드린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유사를 비롯하여 마을에 해가 있다고 여긴다. 언제인가 실제 마을에 이런 일이 있었다. 제를 지내기 위해 장을 보아 제물을 준비해 놓았는데 마을에 사고가 생겨 제를 며칠 미루게 되었다. 그런데 유사가 준비해 놓은 제물을 잘 보관하지 않고 먹어 버렸는데,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유사가 이유 없이 죽었다. 이를 두고 마을 사람들은 유사가 정성을 드리지 않아 벌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때문에 마을 사람들도 제의 기간에는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다. 특히 유사의 집에 함부로 출입하지 않으며, 짐승도 함부로 잡지 않는다. 만약 제 지내기 일주일 전에 마을에 초상이 났다면 날을 연기한다.

    제비는 제 지내기 일주일 전에 반장이 각 가정을 돌아다니며 집집마다 3,000원이나 쌀 두되 정도를 걷는다. 이 때 부정한 집에서는 제비를 걷지 않는다. 요즘은 마을의 교인들이 제비 내기를 자꾸 꺼려하여 받지 않고 있다. 이렇게 추렴하여 한 번 제를 지내는 데는 약 30만 원 정도가 소요된다.

    제비가 마련되면 섣달 그믐날 통장과 반장이 대전 시내로 제물 구입을 위해 나간다. 장을 보러 갈 때는 부정한 것을 보지 않도록 조심하는데, 혹시나 부정한 것을 보게 되면 서로 못본 척하고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제물 값은 주인이 달라는 대로 모두 주고 흥정은 하지 않는다.

    제물은 유사가 마련한다. 제물로는 백설기(닷 되 분량), 삼색실과, 포 두 마리, 소머리, 무나물, 감주(청수와 술로 담근 술) 등을 사용한다. 소머리는 황소머리를 사용하며, 삶아서 반을 잘라 하나는 산제를 지낼 때 쓰고, 나머지 하나는 거리제 지낼 때 쓴다. 또한 나물에는 고춧가루를 넣지 않으며, 소금간만 약간 한다. 제당이 세 개 있으나 제물은 한 몫만을 마련하여 돌려가며 사용한다.

    제기는 하탕 옆의 당집에 보관하고 있다. 현재 보관되어 있는 제기는 1995년에 새로 마련한 것인데, 그 이전 것은 도둑을 맞았다.

    음력 정월 초이튿날 밤 11시쯤이 되면 축관과 유사 그리고 짐꾼 두 명이 제물을 꾸리고 산으로 올라간다. 제물 이외에 불을 피우기 위한 정작을 가지고 올라가는데, 이 장작은 마을 사람들의 집에서 하나씩 추렴한 것이다. 이 장작을 가지고 올라가는데, 이 장작은 마을 사람들의 집에서 하나씩 추렴한 것이다. 이 장작을 이용하여 밥을 짓는데, 불을 피워 일단은 한겨울의 추위를 이기고, 다 타고 남은 알불로는 메를 짓는다. 메는 하탕에 도착하여 지어서 밥이 다 되면 그것을 들고 상탕으로 올라간다. 상탕에 도착하면 제물을 진설하고 곧이어 제를 진행한다. 제물을 진설할 때 특이한 점은 삶은 소머리 반쪽에 칼을 꽂아 두는 행위이다. 이렇게 해두면 잡귀가 근접하지 않는다고 한다. 진설을 마치면 절차에 따라 제를 진행하는데, 제의는 유교식으로 거행된다. 헌작과 재배에 이어 축을 읽는데, 축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아 올린다. 이어 소지를 올리는데 소지는 마을의 평안을 위해 올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상탕에서의 제를 끝내고 내려오면서 중탕, 하탕에서도 동일한 방법으로 제를 지낸다. 축과 소지는 상탕에서만 읽으며, 하탕에서는 제를 마친 후 해물리기를 하고 하산한다. 이렇듯 제를 거행하고 나면 새벽 3시경으로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이에 1990년대 중 반경부터는 상탕과 중탕의 제의는 생략하고 한탕에서만 제를 지내고 있다.

    ② 금동의 용왕제

    산제가 끝나면 장소를 옮기어 하탕 옆의 용소로 나아가 용왕제 지낼 준비를 한다. 샘 곧 용소에서의 제의는 마을의 물을 관장하는 용왕에게 올리는 제이다. 이용소의 용왕은 마을의 모든 물을 관장할 뿐만 아니라 일 년 내내 농사를 짓는데 필요한 물을 단속하는 신격으로 농사와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존재로 인식된다.

    용소에 제물을 진설하는데, 용왕제 제물로 고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제외한다면 다른 제물은 산제와 동일하다. 제의 구성 역시 분향, 강신, 초헌, 아헌, 종헌의 순으로 동일하게 진행한다. 종헌에 임해 세 장의 소지를 올리는데, 먼저 용왕소지를 올리고, 만동소지, 주민소지의 순으로 올린다. 용왕소지를 올리면서 유사는 다음과 같은 축원을 한다. “동쪽의 동방청룡수, 남쪽의 남방적룡수, 서쪽의 서방백룡수, 북쪽의 북방흑룡수, 중앙의 중앙황룡수 등 각 방위의 용왕신께 일 년 내내 맛좋은 물 내러주시고 물 잘나기를 기원하나이다. 사해 용왕님께서 그저 일 년 내내 농사짓는데 가뭄 없도록 보살펴 주시기를 바라 나이다”. 이렇게 소지 세장을 올리고 용왕제를 마치면 유사 일행은 간단히 음복을 한다. 삶은 소머리를 썰어 놓고 제 지낸 술을 가져다 잔을 돌린다. 동시에 마을에서 첫닭이 울기를 기다린다. 하산은 반드시 첫닭이 운 뒤에 해야 한다.

    ③금동의 거리제

    산제를 마친 날 아침 8시경이 되면 거리제를 지내기 위해 제장으로 간다. 제장은 마을 입구의 정자나무이다. 제물이 제일 앞에 가면 그 뒤를 유사와 풍물이 따른다. 거리제를 지내기 위한 제물은 따로 흰설기, 삼색실과, 포 두 마리, 소머리(반쪽)를 준비한다. 정자나무 앞에 자리를 깔고 거기에 제물을 진설하고 바로 제를 시작한다. 거리제는 ‘길 대장군’을 위하는 제이다. 거리제에도 산제와 마찬가지로 축과 소지가 있으며 절차도 비슷하다. 소지는 길대장군 신소지와 만동소지, 마을사람소지 등 세 장 올린다. 이 때 "사해팔방 이십 사방의 길을 관장하는 길 대장군님께, 마을의 주민들에게 발생할 지도 모르는 모든 재난과 부정을 물리쳐 주십사“라고 기원한다. 이렇게 소지를 올리고 재배를 하면 거리제가 마무리된다.

    한편 거리제가 끝나면 고시레가 이어진다. 물이 담긴 바가지에 제에 올렸던 각종의 음식을 조금씩 데어 담는다. 곧 물바가지에 떡, 과일, 고기 등을 담아서 동구 밖으로 가져간다. 그리고는 사전에 준비한 식칼을 동구로 가서 던진다. 이 때 칼끝이 마을 바깥으로 향하면 준비해 온 음식이 담긴 바가지를 칼끝으로 향하면 준비해 온 음식이 담긴 바가지를 칼 끝에 뿌린다. 그런데 칼을 동구 밖으로 던졌을 때 칼끝이 마을 밖으로 향하지 않으면 몇 번이고 반복한다. 대개 세 번 이내에 칼끝이 마을 바깥으로 향한다.

    거리제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이 풍장을 울리며 산신제와 용왕제, 거리제가 무사히 마감된 것을 자축하는 놀이판을 벌인다, 이렇게 한동안 놀이판이 지속되다가 풍장패, 마을 사람들에게 아침 식사를 대접한다. 아침을 먹은 뒤 풍장패들이 유사집의 지신을 밟아준다. 이들은 먼저 유사집의 마당에서 풍장을 울려 신을 기쁘게 하는 오신 행위를 한다. 그리고는 부엌의 조왕신 앞에서 마찬가지로 풍장을 울려 흥겨움을 돛 구고 아울러 축원을 하며 유사 집안이 두루 태평하고 대길하길 기원해 준다. 풍장패들은 유사 집에서의 지신밟기가 끝나면 인근의 집으로 장소를 옮겨 지신을 밟아준다. 이러한 지신밟기는 하루 종일 계속된다. 이 때 마을의 각 가정에서는 간단한 음식으로 풍장패들을 대접하거나 또는 약간의 금전을 내놓기도 한다.

    산제를 지내기 위해 유사일행이 산으로 올라가면 각 가정에서는 ‘초사흘 고사’를 올린다. 시루떡과 포, 과일, 청수를 간단하게 차려 안방의 윗목 성주께 놓고 가정의 평안을 기원한다. 기원을 마치고 상을 걷어 두었다가 다음날 마을 사람들과 나눠 먹는다.

    (3) 그 밖의 현황

    금동에서는 가뭄이 들었을 때 비가 오기를 바라며 우제를 지낸다.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라는 생각이 들면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여 의논하여 날을 잡고 우제 지낼 준비를 한다.

    제를 지낼 때에는 먼저 마을 사람들이 마을 어귀의 보골 이라는 곳으로 전부 모인 다음 준비한 돼지의 목을 따서 흘러나오는 피를 담아 보골에 있는 뱀처럼 생긴 바위에 뿌린다. 그런 다음 미리 준비해 온 축문을 제관이 읽는다. 주된 내용은 “용왕님, 우리 마을 사람들이 물이 없어서 목이 타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비를 내려 주셔서 우리 마을 풍성하게 해 주십시오”라는 내용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축문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고 제를 지낼 때마다 작성해서 사용한다. 이 때 위하는 용왕신은 보통 다섯 명이라고 생각한다. ‘동방청제부인용왕신’, ‘남방적제부인용왕신’, ‘서방백제부인용왕신’, ‘북방흑제부인용왕신’, ‘중방황제부인용왕신’등이 그것이다.

    이제는 통장, 반장이 주관을 해서 지내는데, 축관은 산제에서 축관을 맡은 사람이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제물은 산제 지낼 때와 거의 비슷한데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소머리 대신 산돼지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비는 돼지 값, 떡값, 과일값 등을 포함해서 마을 사람들이 공동부담 한다. 이 마을은 농업이 주된 생계수단이므로 우제 지낼 때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참석한다. 뿐만 아니라 구청 동사무소에서도 찾아와 이 우제에 참석하기도 한다. 이렇게 축문을 읽으면서 제사를 진재면 그 날 아니면 늦어도 일주일 이내에 비가 온다. 이 때 내리는 비는 그냥 다 맞아야 한다. 우산을 쓴다거나 우비를 입는 행동은 오히려 용왕신의 비위에 거슬리는 행동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대전직할시 향토사료관, 1993, pp.70~74./대전직할시사편찬위원회, 1994. pp.480~485./대전광역시 중구, 1998, pp.907~915. 김학중(남, 62세, 1997년 현재, T.285-7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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