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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집]은행동이야기
  • 정생동(政生洞) 정생골(중성골)의 거리제
  • 정생동(政生洞) 정생골(중성골)의 거리제

    (1) 조사지 개관

    정생동은 남. 서쪽으로 금산군 복수면과 시계를 이루고, 동남쪽으로는 어남동, 동북쪽으로는 정생 천을 사이에 두고 금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북쪽으로는 목달동과 침산동이 동계를 이루는 산간에 자리 잡고 있으며, 정생천이 흐른다.

    백제 때 우술군의 지역이었으며, 신라 때는 비풍군의 지역이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공주목에 속하였다. 고종 32년(1895)에는 공주목 산내면의 자연마을로 정생리, 답적리(踏積里), 묘각리(妙角里)로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회덕군 산내면 정생리로 통합되었다. 그 뒤 1935년 대전부의 설치로 대덕군 산내면 정생리로 편입되었다가 1989년 1월 1일 대전시 중구 정생동으로 되었다. 현재 행정동은 산서동이다.

    정생1동에는 남성 바우, 묘각골(妙角谷, 묘각동, 요각골), 서낭골, 산장말, 벌뜸, 사봉골(사방굴), 담석골, 정생골(중석골, 중성골) 등 8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묘각골은 정생동 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묘각사(妙角寺)라는 절이 있었으므로 묘각 골이라 하였다. 이 곳 은 임진왜란 때 이 지역에서 승병(僧兵)들이 운집하였던 곳이며 영규대사 영정을 모신 영정각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그 자리에 영규대사 순 의비를 세웠다. 사봉 골은 사봉 굴, 사방굴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자리에 영규대사 순의 비를 세웠다. 사봉골은 사봉굴, 사봉곡(沙峯谷), 사방굴이라고도 부르는데, 정생골 남쪽의 벌뜸이다. 정생골은 정생소류지 북쪽 정생천변에 위치한 마을이다. 공주 이씨 이명덕(李明德) 정승의 묵묘가 있는 마을로서 정승이 나온 마을이라 하여 정생골(政生里), 중석골이라 하였다 한다. 또는 정생골 북쪽 산밑에 있는 바위가 거북이(남생이)처럼 생겼다고 하여 남생골이라고도 불린다. 정생1동에는 정생골에 약 70호가 거주하고 있으며, 나머지 자연마을에는 2~3가구씩 거주하고 있다. 이들 마을에서는 주로 담배, 배추, 고추 등을 재배한다. 마을에 농협, 새마을금고, 진료소 등이 있다. 병원, 시장은 대전 시내를 이용한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불교신자이며, 기독교인은 몇 집 안된다. 예전에 이 마을에 교회가 들어오려고 했으나 마을 사람들의 반대가 심해서 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

    정생2동에는 사기점골, 담적골(답적골), 웃말이 있다. 담적골은 답적골이라고도 하는데, 정생동 남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옛 절터에 탑이 있었는데, 탑절골이라 하던 것이 답적골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사기 점골은 정생동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이곳에서 사기그릇을 생산하였으며, 판매도 하였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조선시대 도요지(陶窯址)가 남아 있다.

    정생2동에는 사기점 골에 8호, 담적골에 10호, 윗말에 12호가 거주하고 있다. 병원과 금융은 주로 정생1동을 이용하며, 교통은 다소 불편하다. 마을에 교회는 없으나, 주로 학생들이 금동과 목달동에 있는 교회에 다니고 있다.

    (2) 제의 실태

    ① 정생골(중성골)의 거리제

    중성골은 매년 음력 정월 초이튿날 거리제를 지낸다. 제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 없지만 정생 1동의 모든 마을이 함께 제를 지내고 있다.

    원래 거리제 잡숫던 나무는 밭 한 가운데에 위치한 매우 오래된 미루나무였는데, 도로를 내자 죽었다. 그래서 1990년대 초반에 마을 입구에 작은 버드나무를 한 그루 심고 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미루나무 옆에 있던 ‘독작(선돌)’을 옮겨 놓았다.

    초하룻날이 되면 주민들이 모두 나와 마을을 청소한다. 먼저 거리제 잡숫는 나무에 금줄을 두르고 황토 세 무더기를 그 아래에 놓는다. 제물을 마련하는 집의 싸리문 앞에 금줄을 드리우고 황토를 세 무더기씩 두 쪽으로 갈라 여섯 무더기를 놓는다. 제 지낼 때는 음식 장만이 가장 깨끗해야 하므로, 이렇게 해두어 정성 드리는 집임을 표시한다. 그러면 부정한 사람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유사집 에는 어떠한 표시도 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특별히 알리지 않아도 알아서 주민들이 출입을 삼가고 주심하기 때문이다.

    제관은 생기 복덕을 보아 운이 닿는 사람으로 두 명을 정한다. 설 쇠기 전에 미리 뽑아 두는데, 제를 주관하는 사람은 ‘유사’라 하고, 남자이어야 한다. 다른 사람은 음식을 장만하는 사람으로 특별한 명칭은 없으나 남녀의 구분이 없다. 남자가 유사가 되면 그 부인이 제물을 마련한다. 만약 남자가 운이 닿았는데 그 부인이 생리중이면 그 사람은 제관을 맡을 수 없으며, 집안에 갓난아이가 있어도 제외된다. 이는 아이가 있는 집에서는 아이의 대. 소변을 가려주어여 하므로 자연스레 부정한 것을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되도록 아이가 모두 성장한 집을 선정한다. 하지만 이렇게 엄정하게 제관을 선출한 것은 1950년대 초반 경으로, 그 이후로는 생기 복덕을 보지 않고 이장이나 통장이 제를 주관하고 있다.

    일단 제관으로 선출되면 제 지내기 사흘 전부터 일정한 금기를 지켜야 한다. 바깥출입을 삼가고 담배도 피우지 않으며, 부부간의 동침도 금한다. 또한 개미나 쥐 등의 죽은 동물을 보지 않아야 하며, 저녁마다 미리 목욕을 해야 했다. 이러한 금기를 모두 지키려면 어려운 점이 많았다. 만약 유사가 부정한 것을 보거나 마을에 초상이 있으면 제를 지내지 않고 날을 물려야 하나 지금까지는 그러한 일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제관과 달리 마을 사람들은 특별히 조심해야 하는 것은 없지만 살생을 하는 일은 알아서 삼간다. 만약 제를 잘못 모셨다면 마을에 우환이 끊이지 않는다. 따라서 유사는 동네 사람들에게 나쁜 말 들을 것을 걱정하여 정성을 다한다. 그러나 유사가 제를 잘 모셨을 경우에는 그 덕으로 득남을 한 경우도 있다.

    제비는 동네 돈으로 충당한다. 예전에는 동답이 있었으나 언제인가 이를 팔아서 동네 돈으로 마련해 두었다. 이것의 일부를 꺾어서 제비에 충당하고 있다. 만약 돈이 모자랄 때는 통장이 마을을 돌며 성의껏 제비를 걷는다. 걸립할 때 풍장은 치지 않는다.

    장은 음식을 마련하는 사람이 그믐날 나가서 장만해 온다. 장을 볼 때에는 정성들이는 것이므로 값을 깎지 않는다. 제물은 삼색실과, 떡(흰 설기, 세 되 세 흡 분량), 과일, 명태포 두 마리, 나물(도라지, 고사리, 숙주나물), 술, 메, 탕, 김, 조기, 소고기, 돼지머리 등을 놓는다. 술은 예전에는 담가서 사용하였지만 근래에는 사다가 올린다. 소고기는 산적을 해서 놓으며 돼지머리는 예전에 쓰지 않다가 최근에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제기는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으므로 음식 장만하는 집의 그릇을 깨끗하게 씻어서 사용한다.

    정월 초이튿날 11시경이 되면 유사와 음식 마련한 사람이 함께 거리제장으로 향한다. 이 때 풍물은 치지 않으며 제사는 조용한 가운데 진행한다. 제장에는 상을 놓지 않고 짚을 깐 뒤, 그 위에 흰 종이를 깔고 제물을 진설 한다. 재배를 한 후 유사가 독축 후에 축문을 불사르고, 소지를 올리는 데, 거리제소지, 개인소지, 우마소지의 순으로 올린다. 개인소지는 유사가 소지종이에 대주의 이름을 적어서 올려준다.

    마을의 제사가 시작되면 각각의 집에서도 마짐 시루라 하여 치성을 드린다. 마당에 황토와 짚을 깔고 청수와 시루를 함께 올린다. 그리고 자신의 집과 자식들의 평안을 위해 정성을 드린다.

    제가 모두 끝나면 진설했던 음식을 제장에 조금씩 떼어놓는데, 이것을 먹으면 재수가 있다고 하여 금새 없어진다. 이 후에는 음식 장만한 집에 모여서 제물을 나누어 먹는다. 그러나 요즘은 참여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 제사가 끝나면 나무 아래에서 곧장 음복하고 헤어진다.

    <대전직할시 향토사료관, 1993. pp.47~50./대전직할시사편찬위원회, 1994. pp.504~509./양순이(여, 72세, 1997년 현재, 대전에서 20세에 시집옴, 유사 경험 있음. T.285-6640)>

    ② 참고자료

    대덕군 산내면 정생리(政生里) 중성 골마을 거리제(현 대전 중구 정생1동 중성골)

    이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열 사흗날 오후에 거리제를 지낸다. 제장은 마을 북쪽에 위치한다. 제장에는 위하는 나무가 있는데, 약 100년 쯤 된 포푸라나무 이다. 제관은 40대 이상의 부정이 없는 남자 후보자 중에서 선출한다. 제관으로 선정이 되면 깨끗한 물에 목욕재계한다. 제비는 각호에서 거출하여 충당하는데, 약 3,000원 정도가 소요된다. 제물은 술(酒), 흰설기, 메밥(白飯), 우육(牛肉), 과실(果實) 등을 준비한다. 제를 지낼 때에는 부정하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참석 할 수 있다. 당일 초저녁에 입제(入祭)하여 정중히 제를 지낸다. 제가 끝나면 다음날 유사집에 모여 음복을 한다. 이때에도 역시 부정하지 않은 사람들만 모인다.(<전국부락제당조사질문지-충남편(1)>, 한국 민속박물관, 1967에서 인용함.)

    ③ 사기점골 산신제

    제는 매년 음력 정월 초이튿날 자정에 동네 앞 금상산에서 지낸다. 산신이 노하면 농사도 안되고 사람들이 객사하는 등 마을에 우환이 들끓기 때문에 해마다 제를 지내는 것이라고 한다. 산제를 모신 것은 마을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니 매우 오래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금상산의 중턱에 당집이 한 채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산 제당이다. 산 제당 옆에는 오랜 된 나무 여러 그루가 서 있다. 이 나무 아래에 떡시루와 작은 노구솥이 엎어져 보관되어 있었으며, 다른 제기들은 당집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당집 근처에 있는 자연 제당인 바위에서 오랜 된 나무 여러 그루가 서 있다. 이 나무 아래에 떡시루와 작은 노구솥이 엎어져 보관되어 있었으며, 다른 제기들은 당집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당집 근처에 있는 자연 제당인 바위에서 제를 올렸으나, 음력 정월의 추운 날씨는 물론이고 눈이 오거나 비가 오는 등의 기상상태가 좋지 않으면 제를 지내는 것이 더욱 힘들어서 제당을 지었다.

    산제 당은 시멘트 벽돌로 벽을 세우고, 슬레이트 지붕을 얹었다. 당집은 약 10여 년 전에 지었다고도 하고 30여년이 되었다고 하여 정확한 건립 시기는 알 수 없다.

    제 지내기 사흘 전인 섣달 그믐날 제관을 제외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마을 길을 청소하고 산제 당 가는 길을 닦고, 산제 당 주위를 청소하며, 나무를 해서 서너 짐 모아 둔다. 이 나무는 제 지내는 동안 화톳불을 놓는데 사용된다. 또한 제당과 유사 집에 길지 끼운 금 줄을 두르고 황토도 양쪽에 각기 세 개씩 모두 여섯 무더기를 놓는다.

    제관은 제 지내기 한 달 전에 마을 어른들이 동네회의를 열어 선출한다. 새이기 복덕을 보아 운이 닿고 깨끗한 사람으로 뽑는다. 집안에 달거리하는 여자가 있을 경우에는 대상에서 제외한다. 제관은 제사를 주관하는 축관과 음식을 장만하는 유사로 두 명을 선출한다.

    제 기간에 마을 사람들이 특별히 조심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제 기간에 부정이 있으면 제를 물리게 된다. 출산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여 상관하지 않지만 초상이 났을 경우에는 부정하다 하여 제를 미룬다. 한 번은 유사가 산 제당에서 제기를 가져오다가 고양이 죽은 것을 보아 제를 지내지 못한 적이 있다. 고양이는 원래 요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이 되면 제는 보름날에 지내게 된다.

    보름은 일반적으로 좋은 날로 생각하므로 제를 연기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의 례 껏 보름날로 정한다.

    제관으로 선출되면 평소처럼 생활하다가 사흘 전부터 금기를 지킨다. 그 후로는 매일 찬물로 목욕재계를 하고 술. 담배를 먹지 않는다. 특히 나쁜 것을 보지 않도록 조심하는데, 초상집 같은 부정한 장소에는 절대 가지 않는다.

    산제를 지낸 후에 동네가 편안하지 않을 경우에는 마을 사람들은 제관이 제를 잘못 모신 탓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제관은 매우 정성을 들이지 않을 수 없고 이러한 일들을 큰 부담으로 느꼈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제를 없애자는 이야기도 있었으나 마을 어른들의 반대로 지금껏 이어지고 제비는 동네에 마련되어 있는 돈으로 충당한다.

    가령 마을 사람들이 단체로 일을 해서 받은 돈, 출향 인사가 낸 돈, 제 후에 지신 밟으며 걷은 돈 등이 모두 동네기금으로 쓰여 지는 것이다.l 산제를 한번 모시는 데에는 약 35만원 정 도가 든다.

    장은 그믐날 유사 혼자 보러간다. 제물을 살 때에는 값을 흥정하지 않는다. 정성 들 이는 음식이므로 깔끔하게 장만해야하기 때문이다. 장만한 제물은 장보는 그릇을 준비해가서 담아오고, 집에 가져온 후에도 쥐가 먹지 못하도록 마분지로 싸서 광에 잘 보관한다. 제기는 마을에서 장만해 놓아 산제 당에 보관되어 있다. 제 당일에 유사가 제기를 가져다 닦아서 사용하고 초사흗날 제가 끝나면 다시 가져다 놓는다.

    산제에 쓰이는 제물은 삼색실과, 명태포 한 마리, 소머리, 나물, 떡(흰설기, 세 되 세 홉 분향), 메, 탕(명태, 홍합 등의 삼탕), 술 등이다. 나물은 다섯 가지로 고사리, 도라지, 숙주, 시금치, 무나물 등을 쓴다. 술을 제일 일주일 전에 유사가 직접 담근다. 제 음식에는 고춧가루를 사용할 수 없으며 소금간은 하지만 맛은 보지 않으며, 유사 집에서 마련한다.

    당일 밤 9시쯤부터 제물을 준비하기 시작하여 11시경이 되면 마련된 제물을 가지고 산 제당으로 향한다. 산에 오르는데 약 30~40분이 소요됨으로 12시경이 되어야 제사를 시작할 수 있다. 이때 마을 사람들은 준비해 둔 나무로 화톳불을 켜 놓고 집집마다 기둥에 등을 밝혀 놓는다. 불을 켜두는 이유는 산에 오르는 사람들의 무서움을 달래준다는 의미와 제장에는 함께 오르지 못하지만 마을 사람 모두가 잠자지 않고 산제에 동참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제장에 오를 때부터 제가 끝날 때 까지 마을에서 계속해서 풍물을 울린다.

    산 제당에 도착하면 제당 안의 제단에 진설을 한다. 제당의 선반이 비좁아 제물은 좌우로 넓게 진설한다. 진설이 끝나면 재배를 하고 신령에게 고하는 축을 읽기 시작한다. 축은 옛날부터전해오던 것을 권성홍 할아버지가 옮겨놓았는데, 요즘 젊은이들이 한문을 읽을 줄 몰라서 한글로 뜻풀이 하여 만들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세차 정월 삭 초삼일 유학 ???는

    금강산 산신님께 감히 고하나이다.

    세봉우리 특히 빼어난데서 구름 위에 높이 나왔는데

    일방에 웅진 함은 중산의 조종이라

    맑은 기운 뭉친 곳에 아래에 한마을 열려

    上下로 각기 동네 나뉘었고 각성바지 모여 사는데

    혹은 선비요 농가가 예부터 오늘까지 오매

    실은 신의 힘을 힘입어서 각기 그 직업을 편안하였으니

    한동네 여러 서민들이 은혜입음을 어찌할 수 없어서

    이 정월 초삼일을 정하여 나무에게 의지하여 정성 드려

    삼가 빚은 술로 치성 드려 비오니

    신계 옵 소 그에 도 우사 상서롭지 못함을 제거하시고

    온갖 복을 내리 사 길이 재앙이 없게 하요

    이에 좋은 경사내리시어 모든 일이 뜻과 같이 되어 지기

    거이 이르게 하소서 이에 드리는 것을 내려 보시고

    흠향 하소서

    이어 소지를 올린다. 소지는 가구당 소지를 올려주며, 제 지내기 전에 마을 사람들이 축관에게 자신들의 소망을 말해 기원해 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면 축관은 “이 소지는 본 동의 ???소지입니다. 이 집은 아들이 없으니 아들을 낳게 해 주십시오”라는 식으로 각 가정의 형편에 맞는 덕담을 덧붙인다.

    새벽 1시쯤 제가 끝나면 진설했던 음식을 조금씩 담아서 제당 주위에 뿌려 놓는다. 이 음식은 먹으면 좋다고들 하는데, 제 다음날 가보면 마을을 지키는 큰 짐승이 먹기도 했다고 한다. 제물로 사용한 대추를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믿어 아들이 없는 집에서 주워다 먹기도 하며, 밤을 먹으면 일 년 내내 건강하다고 하여 역시 주어다 먹는다.

    제를 마치고 날이 밝으면 아침에 마을 사람들이 축관집에 모여 소머리국을 끓여 밥을 먹는다. 그리고 제물을 조금씩 나누어 30개를 만들어 제에 참석하지 못한 집에 봉송한다. 산제 음식은 귀하고 좋은 것이기 때문에 여럿이 나누어 먹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초사흗날은 음복이 끝난 후 마을을 돌며 지신을 밟는다. 풍물패는 집집마다 들어가 마당부터 시작해 부엌, 장광, 샘, 마당의 순으로 지신을 밟아준다. 이 때 집에서는 장광이나 부엌에 한 말 정도의 쌀을 올려놓고 초를 꽂아놓는다. 이렇게 걷은 쌀을 마을 기금으로 이용한다. 또한 집마다 풍물패가 들어오면 음식을 내와 대접을 하고 작년에 지신을 밟아 집안이 평안했다며 특별히 풍물패를 부르는 집도 있다고 한다.

    <김용배(남, 46세, 1997년 현재, 축관경험 있음, T.285-6649)/권선홍(남, 70세, 축관경험 있음, T.285-3976)>

    ④ 참고자료

    대덕군 산내면 정 생리 답적 마을 산제(현 대전 중구 정생2동 답적골)

    이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초사흘에 제를 지낸다. 마을 사람들은 산제를 안지내면 호환을 입는다고 여겨 해마다 제를 지낸다. 산제 당은 마을 남동쪽 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 남향을 하고 있는 함석집으로 건평 2칸 내외이다. 제당 내부에는 제단이 없으며, 바닥은 콘크리트로 되어 있으며, 그 밖의 시설물은 아무 것도 없다. 제관은 산제유사로 선정이 되면 강물에 목욕재계한다. 또한 부정(不淨)을 중시(重視)여겨, 출산의 부정이 생기면 제일을 연기한다. 제비는 각호에서 헌납하는 포백(佈帛), 곡물, 금전으로 충당하는데, 약 4,000원 정도가 소요된다. 제물은 소머리, 술(酒), 과실(果實), 포 등을 준비한다. 초사흘 자정(子正)에 입제(入祭)하여 제를 마치고도 촛불을 밝히고 정중히 기도를 계속한다. 그리고 새벽 4시쯤 첫닭이 울면 비로소 철상을 한다. 음복은 다음날 유사집에서 하는데, 이 때 에도 부정하지 않은 사람들만 모인다. (<전국부락제당조사질문지-충남편(1)>, 한국 민속박물관, 1967에서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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