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이전
  • 다음다음
  • [제26집]은행동이야기
  • 목동(牧洞) 목골마을의 용왕제
  • 목동(牧洞) 목골마을의 용왕제

    (1) 조사지 개관

    목동은 북쪽으로 중촌동과 접하며, 동쪽으로 선화3동, 남쪽으로 용두1동, 서쪽으로 용두2동과 접한 남부 구릉에 위치하는 지역으로 용두봉 동북쪽 일대에 자리 잡고 있다. 동서로가 목동을 질러가고, 목동길이 남북으로 놓여 있다.

    백제 때는 우술군(雨述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비풍군(比豊郡)에 속했었다. 조선시대에는 공주목 산내면에 속한 목골 또는 못골이라 했는데, 고종 32년(1895)에 회덕군 산내면 하룡리, 중촌리, 방축리, 목동리에 속하다가, 1914년 대전군이 신설되자 이들 지역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외남면 방축리라 하였다. 1932년 12월 현재 면적이 0.70㎢이고, 2,725세대(인구 9,564)이고, 17통 85개 반으로 구성된 행정동이자 법정동으로 동사무소가 소재하고 있다. 목동의 주요기관으로는 목원대학교를 비롯하여 대성중. 고등학교 등 교육기관이 많고, KBS 방송총국, 을지병원과 선병원, 5개 경로당에 있다.

    목동의 자연마을은 목골, 방죽골, 샘골(생골), 점골 등이 있었다. 그 중 목골은 못골, 목동(牧洞)이라고도 부른다. 방죽골 아래쪽 못의 건너편에 있었던 자연마을이다. 지금의 KBS 방송총국 옆으로 일제 때 군량미 수송을 위해 송참봉의 땅의 빼앗고 그 땅의 일부에 긴 못을 파 논에 물을 대었는데, 그 못 근처의 마을을 목골 또는 못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방죽골은 방축리(坊築里)라고도 하는데, 목골 옆에 있던 마을로 지금의 목동 새마을유아원 자리에 방죽이 있었는데, 그와 인접한 목동사무소 자리에 있던 마을이다. 방죽 부근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방죽골 또는 방축리라 했다. 또한 하룡리, 중촌리, 방축리, 목동리 각 일부를 편입하여 1914년 대전군 외남면 방축리라 하기도 하였다. 샘골은 생골 이라고도 하는데, 목동천주교회가 있는 자리에 있던 마을을 말한다. 이곳에 맑고 깨끗한 샘물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점골은 점촌, 점촌리라고도 부르는데, 목원대학교 옆 천주교 자리 아래에 있던 마을이다. 허씨네가 여기서 옹기를 굽고 팔았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2) 제의 실태

    ① 목골마을의 용왕제

    목골에서는 매년 정월 열 나흗날 오전 11시경에 샘과 나무에서 용왕제를 지내고 있다. 제는 200년이 넘었다고 전해질 뿐 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1960년대 중반까지는 여자가 제관을 맡아서 한 밤중에 제를 지냈다. 제관이 축원하는 소리를 알아들을 수가 없고, 여자들은 욕심이 많아 자기 집 소망만을 빈다고 생각하여 제의를 공개하자는 취지로 제관을 남자로 바꾸고 제 시간도 낮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용왕제를 지내는 샘은 마을의 중앙에 위치하며 그 옆에는 큰 팽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이 나무를 ‘수호목’이라고 하는데, 이는 용왕을 지켜주는 나무라는 뜻이다. 제는 바로 이 수호목과 용왕에 각기 지낸다. 이 두 곳 중 나무보다는 샘이 더 중요한 신앙대상물로 여긴다.

    제일 사흘 전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청소를 한다. 샘과 나무에 금줄을 드리우고 황토를 뿌린다. 그러나 제주 집에는 금줄과 황토를 사용하지 않는다. 샘은 약간의 품삯을 주어 청소를 시켰는데 요즘은 자동 펌프로 물을 품고 있다. 샘을 청소한 후에는 뚜껑을 덮어 제가 끝날 때까지 마을 사람들이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 따라서 청소전에 마을 사람들은 그동안 쓸 물을 밀 떠다 놓았다.

    마을의 제를 주관하는 사람은 ‘제주’라고 부른다. 제가 바뀌기 전에는 정월 초에 제주를 선출해 정했었으나 현재는 마을의 송준섭 씨가 매해 제주를 맡아보고 있다. 제주는 제 지내기 일주일 전부터 초상이나 출산이 있는 집에 출입하지 않으며, 부정한 것을 보지 않도록 조심한다.

    부정한 사람은 제에 참석할 수도 없으며 제장을 지나다니지도 않는다. 그리고 마을에 초상이 있을 경우에는 제를 물려야 하는데, 초상 부정은 보름 정도 간다고 여겨 그 이후에 날을 잡는다.

    여자들이 제를 주관할 때에 마을의 한 청년이 불만을 품고 제 당일 술에 취해 제장을 부수고 행패를 부리는 일이 있었으며, 그 후 그 청년은 신벌을 받아 죽었다고 한다. 이처럼 용왕제는 매우 영험하기에 정성껏 제를 지내야 한다. 실제 마을 사람들은 용왕을 잘 모시기에 동네가 평안하다고 생각한다. 동네에 크게 좋은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재난이나 환난이 없고 비교적 평온한 것은 모두 용왕이 보살피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또 도심지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인심이 시골같이 넉넉하고 좋은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일제시대 나 6.25때에 징용되어 나간 사람도 많지 않았다고 한다.

    설을 쇠고 나면 곧 제비를 걷는다. 동네 청년들이 풍물을 치며 집집마다 자신을 밟아주면 각 집에서는 상 위에 돈이나 쌀을 성의껏 내 놓는다. 이렇게 하여 제비가 마련되면 걸립한 청년들이 주동이 되어 장을 보러 간다. 이때 특별히 조심해야 하는 것은 없다. 제물은 삼색실과, 포 두 마리, 떡(백설기), 메, 탕, 미역, 김, 청수 등을 사용하며, 탕은 삼탕으로, 어탕, 육탕, 채탕을 끓인다. 제물을 마련할 때에는 고춧가루를 쓰지 않으며, 간은 약간 하지만 맛은 보지 않는다. 제물은 샘과 나무에 각기 사용해야 하므로 두 몫을 마련하는데, 다만 용왕에 미역과 김을 추가로 놓는다. 제기는 제주집의 그릇을 사용한다.

    풍물을 치지 않고 조용한 가운데 진행한다. 제사는 특별한 절차를 가지고 있지 않은데 진설 후 재배를 하고 나면 축을 읽는다. 축은 밤에 제를 지낼 때에는 없었으나 낮으로 시간이 바뀌면서 추가되었다고 한다. 축을 읽고 나면 소지를 올리는데, 먼저 용왕소지를 올리고, 다음 동네소지를 한 장 올린다.

    수호 목에서 지내는 제의도 동일한 절차로 진행되며, 다만 처음에 수호목의 소지를 올리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수호목제가 끝나면 해를 물리는데, 진설했던 음식을 조금씩 떼어내어 주위에 뿌린다. 제사를 지낸 음식을 재수 있는 음식이라고 하여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나누어 먹으며 오지 못할 경우에는 조금씩이라도 싸서 보낸 준다.

    (3) 그 밖의 현황

    이외에도 마을에 마마가 들어온다고 하면 마을 남자들이 밤에 몰래 옆 동네에 가서 디딜방아를 훔쳐다가 뱅이를 한다. 훔친 디딜방아는 마을의 입구에 거꾸로 세워 두고 여자 속곳을 입혀 놓는데, 이렇게 해두면 병이 들어오지 못한다고 한다.

    <대전직할시사편찬위원회, 1994. pp.437 ~ 444./송준섭(남, 84세, 목골이 고향으로, 현재 제주를 맡아보고 있음. T.255-8655)>

    ?